'제주여자가 서울여자'에게 보내는 세 번째 편지 - 40살
언니, 올해로 제주에 산지 딱 10년 차가 되었어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는 가깝게 지내던 우리 다섯 명 모두 30대 초반이었고, 다들 싱글이었는데, 이제는 모두 40대 초반이 되었고 그리고 또, 음, 또, 흐음, 역시 나만 빼고 모두 유부녀가 되었네요.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가 않을까. 암튼 그때는 우리의 생활이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15년쯤이 지난 지금의 내 생활은 아주 많이 달라져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 나는 내가 제주로 떠나온 선택이 더더욱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조금 들기도 해요. 친한 내 친구들과는 혼자만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해, 제주살이가 그럴싸한 핑곗거리가 되어주는 것 같달까. 물론, 육지에서 계속 살고 있었다면 내 삶이 많이 바뀌어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데요, 언니. 지금 이렇게 제주에서 자유롭게 사는 나를 언니도 그렇고, 다른 친구들도 종종 부러워해주지만, 40대가 되면서 나는 정착하지 못한 내 생활이 조금 혼란스럽기 시작했어요. 좋아하는 걸 쫓으며 살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남들처럼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위안 삼곤 했었는데, 40대가 되면서부터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거든요. 그래서 뭘 쫓으며 살아야 할지, 어딜 보며 걸어야 할지, 내 삶에 무엇을 낙으로 삼아야 할지, 진짜로 잘 모르겠어요.
사람이 살며 누군가를 만나고, 아이를 낳아 키워내는 것이, 사실은 인간이 한 생애를 완주하기 위한 필연적인 설정치는 아니었을까. 더군다나 일적으로 균열이 오기 시작하면서, 안정감이 없다는 것이 내 삶에 큰 약점이 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제일 문제가 뭔지 알아요? 마흔이 넘어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후지다는 거예요! 으아악. 아니, 어디서든, 어느 상황이든, 어떤 인생이든, 스스로 한 선택에 맞춰 열심히, 즐겁게 사는 충분히 멋진 사람들이 내 주변에조차도 얼마나 많은데!
하아. 게으른 탓이지. 자유롭게 산다는 말 뒤에 숨어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처음부터 다시 찾아야 할 만큼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는 걸 나 요즘 꽤 많이 실감해요. 그나마 나이 먹어서 다행이다 싶은 거 하나는, 그래도 이렇게 내 인생이 후진 거에 대해서, 남 탓을 할 수는 없다는 걸 잘 아는 거 정도일까.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하지만, 더 후져지지 않기 위해선 내 탓만 하며 한탄해서는 안 되겠지. 40살이 이렇게 젊은 건지 몰랐다며 좋아하는 걸 줄줄 읊어준 언니 편지를 읽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걸 조금 구체적으로 목록화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3년 만에 언니와 주고받는 첫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는 게 좋은 시그널이 되어주는 것 같아요. 적어도 아직 뭔가를 끄적이는 걸 좋아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한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라는 뜻이니까.
언니랑 나 겨우 한 살 차이인데, 이상하게 언니 앞에서는 늘 어리광 많은 막냇동생처럼 굴었던 것 같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내 인생만 왜 이렇게 후져!!!"라고 징징거려봤어요.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키우는 40대에도 변함없이 팔딱이는 인생을 살고 있는 언니의 기운을 이제부터 나는 좀 나눠가져 보려고요. 이 편지를 다 쓸 무렵엔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몇 개 정도는 쉽게 꼽을 수 있을 정도가 되길 바라며!
이번 주도 힘내요, 안녕!
덧.
작년인가. 한 파릇파릇한 아이돌이 인터뷰 중에 새로 나온 앨범의 컨셉을 설명하면서 '지금까지의 노래는 젊은 층이 즐길 만한 노래였다면 이번엔 4,50대의 중년층도 함께 좋아할 수 있는 앨범이다'라고 소개하는 걸 보고, "아, 나 이제 빼박 중년이네" 싶어서 좀 충격이었는데. 근데 웃긴 게 그런 말 듣고도 그 아이돌 노래 시작하자마자 "에잉쯧!"하고 바로 채널 돌렸어요. 감각은 이미 그 아이돌이 말한 중년층도 넘어서버린 걸까. (결정적으로 그 아이돌이 누구였는지 정말 기억이 전혀 안나요. 아마 들어도 모를 것 같아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