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_필연이 필요한가

어쩌면 소설

by 이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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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사는 삶은 가난했지만 참 좋았다. 그래, 가난했다. '설탕이 안 들어갔는데?' '할머니도 몰랐는데 어떻게 알았어? 간도 잘 보네!' 비빔국수를 손으로 비벼주시는 할머니의 옆에서 간을 보고, 주말이면 마당에 핀 돌나물을 캐다가 양푼에 빨갛게 무치고 남은 양념에는 늘 밥을 비벼주셨다. 깻잎으로 전을 부치고, 계란 풀은 라면을 나눠 먹는 그 삶이 많이도 풍족했다. 친구들이 모두 다니던 공부방조차 다녀본 적이 없지만 선생님이 교사용 문제집을 주시면 공부하기에 충분했고 무뚝뚝한 할아버지의 칭찬이 좋았다. 아빠가 새엄마라며 소개한 두 번째 여자는 착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마음이 넉넉했던 할머니와의 생활이 갑자기 사라졌지만 어쩌면 평범한 가족의 일상이 우리에게도 올 수 있지 않을까 아이에게도 그런 날이 온 건 아닐까_ 여자는 아마도 많이 아팠다.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을 두고 아이와 아이 동생을 돌보는 삶이 아마 스스로 화가 났을까, 아이 아빠는 불안하면 술을 마셨고 그 매일의 불안이 매일의 술로 빠져들게 했다. 사랑한다면서 때리는 사람이 그때는 참 불쌍했다. '내가 집을 나가더라도 너희는 내가 데리고 나갈게.''우리 같이 살자, 우리 아빠 정말 불쌍해. 내가 잘할게 같이 살자.' 아이는 또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을 잃는 일이 무서웠고, 아빠를 진심으로 불쌍하다 생각했다. 부둥켜안고 있었지만 여자의 마음이 식어갔다. 아마도 아이와 아이 동생이 미워지고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이는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갔다. 새벽에 일어나 밥을 차려먹고, 혼자 교복을 다려 입고, 청소를 했다. 어쩌다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 여자는 밥도 차려주고 웃어줬다. 아이는 그마저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여자를 엄마라고 계속 불러도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나간 뒤 아빠는 한동안 현관을 잠그지 않았다. 아이가 잠그면 열어놓고 서로 말없는 며칠이 반복됐지만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는 화가 많이 났고 또 불안했기에 취해있는 날을 반복했다. 아이는 엄마가 없어도 스스로 동생을 챙기고 설거지를 하며 아빠와 셋이 잘 살아가고 싶었지만 아이의 아빠는 달랐다. 그 밤, 떡볶이를 사들고 오신 아빠는 아이가 설거지를 하는 그 잠깐동안 아이 동생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이 동생 머리에서 시작된 붉은 피가 거실을 채웠고 조각나 흩어진 선풍기 파편들이 흩어졌다. 그 짧은 찰나에 벌어진 일이다. 아이 동생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듣지 못했고 아이는 다가가지도 못한 채 주저 않았다. 피는 붉구나, 너무도 붉은 것들이 이렇게 흐르는구나, 너무 붉어서 무서웠다. 119에 전화를 걸었고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이는 말을 이어서 할 수가 없었다. 왜 어째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이에게서 아빠는 전화를 뺐고 내가 내 새끼 때려서 피가 나니까 당장 오라며 소리를 질렀다. 구급차가 오고 아이는 여전히 주저앉아 붉은 피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무서워졌다. 그대로 현관을 박차고 나왔고 아빠는 쫓아오며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멈추지 않고 친구집까지 뛰어갔고 눈물도 멈추지 않았다. 꼭 범죄 영화의 한 장면을 찍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빠는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너는 네 동생을 버리곤 간 애야'라고 말했다. 구급차가 떠나고 친구와 빈 집에 돌아와 거실을 채운 선풍기 파편들과 피로 불든 바닥을 닦고 공부할 것들을 챙겨 친구집으로 갔다.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었나 꽤 침착했고 눈물도 어느 순간 흐르지 않았다. 새벽이 돼서야 집에 들어온 아이는 잠든 아빠를 보며 안심했고 아이 동생은 자지도 않고 방에 누어 누나를 불렀다. 누나를 바라보며 머리에 심을 박았다며 웃어줬다. 아이가 기억하는 가장 아픈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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