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텔라언니 Jun 16. 2021

사랑의 불시착과 엄마

사랑의 불시착이 끝났다. 

처음에는 유치하고 어색해서 도저히 못 보겠어서  앞 부분을 스킵하고 5회부터 봤다. <별그대> 박지은 작가 특유의 로맨틱한 화법과 유머, 비현실적이지만 남자 주인공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안 볼 수 없게 만드는 힘! 유치하다 어떻다 흉보면서도 13회부터는 본방 사수하며 열심히 봤다. 

그리고 마지막회! 

리정혁과 윤세리가 금단선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어찌나 애틋하던지 유튜브로 여러 번 봤다 ㅋ

https://tv.naver.com/v/12386037

유튜브로 <사랑의 불시착>을 검색해서 틀어놓으면 “리정혁의 멜로 눈깔 3종 셋트”처럼 가장 달달한 장면만 모아놓은 재미있는 동영상이 엄청 많다. 밥하면서 틀어놓으면 심심하지 않고 좋았다. 오죽하면 남편과 큰애가 “엄마! 사랑의 불시착 좀 그만 봐!”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ㅋㅋ  

https://youtu.be/rXuQT2ZSpxU


드라마를 보면서 10년 후, 20년 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혹은 남북이 교통과 통신교류만이라도  가능해진다면 “리정혁-윤세리”같은 남북 커플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처럼 통일이 되어도 남북은 생활 수준 차이가 있고 지역에 대한 편견도 있겠지. 그래도 교류가 시작되어 젊은 남녀가 만나기 시작하면 사랑의 스파클이 튀는 것을 누가 막으랴. 통일이 비용만 엄청 들고 남한에는 손해라는 입장에서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나는 통일을 지지하는 편이다. 


첫째, 내가 통일을 지지하는 이유는 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고향이 개성인 실향민이다. 14살에 피난을 나온 후, 한번도 지척에 있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개성 시내에서 양조장을 했다고 한다. 사업 수완이 좋고 규모가 커서 살림이 넉넉한 편이었다고 했다. 엄마는 7형제 중 막내였다. 엄마가 세살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15살이상 차이나는 큰 언니(나에게는 큰 이모) 손에 자랐다. 엄마는 8살에 해방을 맞고 13살, 호수돈 여중 1학년 때 6.25를 맞았다. 


실향민들의 기억이 그렇듯 개성에 대한 엄마의 추억은 가히 환상적이다. 고려의 오랜 수도로 기품있는 도시였던 개성은 상인들이 많아 경제적으로도 발달해있었다. 


송도고보, 호수돈여고보 등 명문 중고교도 많았다. 삼촌들은 송도고보를 다니고 두 이모와 엄마는 호수돈 여중고를 나왔다. 호수돈에 대한 엄마의 추억은 매우 아름답다. 호수돈은 “보스턴”의 한자 병음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선교사가 지은 학교이다. 하얀 대리석 건물의 교정은 최신식 교육시설을 갖추었다. 운동장은 개성 특유의 흰 왕모래를 깔고 1940년대에 싱크대를 갖춘 가정실습실이 있었다. 학교 맨 꼭대기층은 피아노 연습실이 있어 아침이면 호수돈 여중고 학생들이 치는 피아노 소리가 학교 주변에 울려 퍼졌다. 


 그런 아름다운 학교를 두 언니에 이어 입학한지 한 학기도 되지 않아 6.25가 터졌다. 엄마는 바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1년간 개성에 있다가 1951년에야 피난을 나왔다. 나는 외삼촌이 4명이나 된다. 집에 젊은 남자가 많으니 혹시나 인민군에게 끌려갈까봐 집안 어르신들의 걱정이 많았다. 밤마다 인민군은 동네 주민들을 모아서 의식화 교육을 시키고 군가를 가르쳤다. 엄마는 오빠들 대신 의식화 교육에 자주 나갔다. 


폭격이 쏟아지면 집 앞에 파놓은 방공호에 숨어야 했다. 심지어 옆집 친구네가 방공호에 숨어들어가는 순간 폭격이 쏟아져 바로 눈 앞에서 친구네 가족이 몰살당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옥 같은 1년을 보내고 외할아버지는 7형제만 피난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당시 외할아버지는 재혼을 해서 젊은 아내 사이에서 자식을 5명이나 더 본 상태였다. 엄마 아래 이복 동생들은 모두 어렸다. 


 당시 개성 사람들은 1주일이면 전쟁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민군의 징집명령이 내릴지 모르는 외삼촌들과 중고생인 작은 이모와 엄마만 피난을 가기로 했다. 큰 이모는 결혼을 해서 부산에 살았다. 큰 이모네로 피난을 가는 것이 목표였다. 


피난을 가는 것이 들킬까봐 머리에 빨랫감을 지고 길을 나섰다. 개성에서 강화도를 거쳐 두달만에 인천에 도착했다. 폭격과 총성이 난무하는 피난길에 올라 천신만고 끝에 부산 큰 이모네 집에 7형제가 무사히 도착했다. 1주일이면 집에 갈 수 있다는 예상과 달리 엄마는 그 이후로 개성 고향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다행히 원양어선을 탔던 둘째 외삼촌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며 동생들을 공부시켰다. 


엄마는 그야말로 천막학교로 중학교를 다니다가 부산 데레사 여고에 진학했다. 엄마는 바로 위 오빠들보다 특출나게 공부를, 특히 수학을 잘했다. 여동생의 재능을 아까워한 막내외삼촌은 대학 갈 나이가 되자 엄마에게 


“나는 남자니까 언제든 대학에 갈 수 있어. 그치만 넌 이번 아니면 못가. 네가 먼저 대학을 가라”

하고 양보했다. 엄마는 당시에 여자로선 드물게 대학을 나왔고 화학을 전공했다. 


엄마의 피난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가끔 뭉클하다. 부산 피난 시절 하꼬방같은 단칸방에 7형제가 모여 살았다. 원양어선을 타는 둘째 삼촌은 몇달에 한번씩 집에 왔다. 둘째 삼촌은 막내인 엄마를 특히 예뻐했는데 하루는 방 벽에 당시 대관식을 올린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사진을 붙여주었다. 

“경희야(엄마 이름), 너보고 여왕이 되라는 건 아니야. 다만 우리는 이렇게 전쟁 속에 있지만 이런 세상만 있는 건 아니란다. 영국같은 선진국도, 엘리자베스 여왕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기억해. 열심히 공부하면 분명히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거야” 

 엄마는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을 1등으로 졸업한 후에 고등학교 수학, 화학 선생님으로 일했다. 그러나 여전히 개성에 깊은 애정이 있으며 생전에 한번이라도 개성 시내를 보고 싶어한다. 

 엄마는 개성에 있는 만월초등학교(고려 유적지인 만월대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소풍은 정몽주가 죽은 선죽교에 자주 갔다 ㅎ)에서 같은 반이었던 친구 4-5명과 여전히 한달에 한번씩 밥을 먹는다. 40살부터 시작된 모임은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예전에 내가 한번 모시고 간 적이 있는데 80대 할머니들의 대화는 놀랍게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남편 얘기, 자식 얘기, 건강, 정치, 사회 돌아가는 것에 대해 소녀처럼 호호 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 모임은 왜 이리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전쟁 때문에 14살에 피난을 와서 다신 집에 가지 못했던 , 그 중에 몇명은 부모를 고향에 두고 내려온 소녀들이 여전히 고향을 잊지 못하고 고향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버티었던 사이가 아니었을까..

 예전에 엄마와 호캉스를 간 적이 있다. 엄마는 통유리가 시원한 호텔 수영장을 보면서 매우 감격해했다. 

“ 인생은 참 알 수가 없지. 불구덩이 같은 폭격을 피하며 중학생 때 피난 나왔을 때 나중에 내가 이런 좋은 수영장에 올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나는 그 때 엄마는 참 별소릴 다해, 하며 엄마말을 흘려들었다. 그러나 나도 마흔이 넘고 나이가 들면서 엄마가 얼마나 많은 삶의 굴곡들을 묵묵히 걸어왔으며, 내게는 내색하지 않은 아픔들이 많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올해 여든 셋이 된 엄마를 보면 통일이 되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살아 생전에 자신이 살았던 개성 시내를 거닐 수 있을까?       


































































































이전 08화 엄마 아빠 찾아뵙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