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중세의 목소리, 사보나롤라

by 이아인


프라 안젤리코의 <성모영보>가 그날처럼 평화로이, 고요히 맞아주는 계단을 오르자 그들의 방이 거기 이어졌다. 마흔 개 남짓 수도자들의 독방이었다. 긴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난 문 사이로 엷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IMG_6685.JPG 피렌체 산마르코 박물관은 도미니코수도회 수도원이었다. 수도자들이 살던 방들도 공개되어 있다.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 한 점이 하얀 벽에 붙어 있는 그 방들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줄이 쳐져 있었다. 그때, 그 시절에, 온갖 '하지 말라'는 요구를 하던 거룩한 사람들의 단호한 손짓처럼 얇은 줄은 그 방으로 들어서기를 금지했다. 작은 방 안에 서서 그들의 흔적을 느껴보고도 싶었건만 문 앞에서 종종거리며 나그네처럼, 도리없이 이방인처럼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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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면 어둑한 복도가 이어졌다. 준엄하기 그지없었던 도미니코수도회의 수사들, 문득 그 백색 옷을 입은 수도사들이 모퉁이를 돌아 나타날 것 같았다. '하느님의 사냥개'를 자처할 만큼 이단에게 단호했던 그들은 오염되지 않은 흰색 옷을 입고 내게도 티 없는 영혼이기를 요구할 것이다. 오금이 저렸다.


나는 이미 너무나 많은 선을 넘었고, 너무 많은 경계를 스스로 무너뜨렸고, 너무나 멀리, 정말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그들이 나에게 영혼의 순결을 요구한다면, 순결을 증명하라고 한다면, 나는 무엇으로도 나를 증거하기가 어렵다. 말도 어눌하고 생각마저 단단하게 익지 못했으므로, 내 영혼의 날갯짓을, 시시로 펄럭이는 그 날갯짓을 변호할 능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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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제는 명백하게 ‘박물관’이 되고 말았지만, 한때 그 서슬퍼런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의 수도원이기도 했던 바로 그곳에서 내 영혼이 오금을 저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그때 살았더라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는 악명 높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교회였고, 메디치가의 휘황찬란한 마케팅이 대중들을 사로잡던 시대였다. 그 뜨거운 혼돈의 시기에 피렌체에 나타난 산마르코 수도원장 사보나롤라는 피렌체를 지배하는 메디치가의 기만과 탐욕을 보았다. 도시에 가득한 허영을 보았다. 그는 ‘새로운 예루살렘’을 외치며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고 참회를 촉구했다. 메디치가의 독재에 고통 받던 시민들은 환호했다. 그들은 이 수도자에게 열광했다. 구원의 날을 준비하기 위해 그들은 시뇨리아 광장에 온갖 사악한 것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 ‘허영의 화형식’이었다.



IMG_6715.JPG 프라 바르톨로메오가 그린 사보나롤라. 교황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추기경 자리를 제안했지만 사보나롤라는 "추기경의 붉은 모자가 아니라 피로 물든 순교의 모자"를 원한다며 거절했다.



양심을 꿰뚫고 참회를 역설하는 수도자의 사자후는 사람들을 울렸다.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이상이란 쉽게 오지 않는 세계 아닌가.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은 후 피렌체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의 삶은 더 피폐해졌다. 프랑스가 쳐들어오고 엄청난 전쟁 비용 때문에 도시가 더 가난해져버렸다. 더 찬란한 피렌체를 바랐던 시민들은 사보나롤라의 '거룩한 말씀'에 질리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내일보다 오늘의 밥이 더 중요하고 더 절실했다. 그의 순결한 믿음이 향하는 세상은 피렌체 시민들이 갈망하는 현세의 복이 아니었다. 그들이 바라던 세상은 오지 않았고, 교황은 사냥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보나롤라를 파문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죄인처럼 가슴을 치며 회개하기를 그만두었다. 교황이 그럴 자유를 선언해주었다. 그들은 사보나롤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사보나롤라가 주었던 희망만큼이나 거센 분노가 피렌체 시민들을 떠밀었다. 자유로이 그들은 사보나롤라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한가지 분명한 건 코시모 데 메디치나 로렌초와 달리 사보나롤라는 ‘뱀처럼 슬기롭게' 처신하는 사람이 못됐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에게 돌진했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사람들에게도 그런 투신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와 달랐다. 너무나도 달랐다. 이것이 그의 죽음이 비극일 수밖에 없었던 명확한 이유였다. 어쩌면 좋을까. 세상은 늘 그렇게 흘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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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끝에 있는 그 방, 그의 방에 들어섰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 작은 방에 용솟음치는 그리움과 사랑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몇백 년 전 그 방에 가득했을 뜨거운 사랑, 신을 향한 사랑 때문에 한없이 경건해지기만 했던 한 사내, 눈앞에 드러나는 타락한 현실의 기만을 용납하지 못해 더더욱 큰 목소리로 횃불이 되었던 바로 그, 사보나롤라.



IMG_6711.JPG 산마르코 수도원 사보나롤라 수도원장의 방



외치는 소리는 언제든 있었다. 구약의 시대에도 있었고, 중세에도 있었다. 암울한 독재 때도 있었고, 21세기 오늘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니까 피렌체의 빛나는 시기였던 때에도 여전히 ‘외치는 소리’는 있었다. 외치는 소리는 위험하다. 구약 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다. 15세기 피렌체에서도 그랬다. 그는 외쳤고, 위험했다. 그리고 그가 공격했던 메디치가와 교황의 반격으로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


당시의 거대한 두 권력, 그 역린을 건드린 것이 그의 유일한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메디치가와 교황청은 서로 견제하는 관계였음에도 사보나롤라를 제거하는 데는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하고 피렌체 시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며 죽었다. 그는 이단자였을까, 스스로를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믿은 허무맹랑한 광신도였을까.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는 것이어서 그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가 별로 없다보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분명한 건 개신교 쪽에서 도리어 그에 대한 평가가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순교자’로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결국 ‘가톨릭교회’에 의해 처형당했고, 그 근본적인 원인이 교황에 맞섰기 때문일까? 가톨릭교회에서는, 더욱이 그의 집이었던 도미니코수도회에서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IMG_6755.JPG 안토니오 회랑의 대식당 입구 프레스코



잠잠한 옛 수도원에서 나는 고통을 보았다. 어떤 목소리들을 들었다. 침묵보다 무거운 목소리들. 피를 뚝뚝 흘리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목소리들이 말하는 건 생의 의미였다. 길과 생명에 대한 얘기였다. 그래서 아팠다. 가시밭길을 걸어온 핏방울이 배어있었다. 그래서 아름답고 그래서 처절했다. 모든 번잡을 뚫고 그 고통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내 생의 가시밭길도 흔들리며 나를 찔러댔다. 타성과 게으름과 불성실 등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목소리들이 물었다. 낯선 길에서, 낯선 곳에서 만나는 것들이 물었다.


여행은, 순례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물음을 찾는 여정이다. 마땅한 질문을 찾는 일. 그리고 돌아와 그 답을 찾아야 가는 길. 그러니까 피렌체 옛 산마르코 수도원에서도 물음들이 불길처럼 꽃처럼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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