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슬픈 러시아
러시아에 간다고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비잔티움 제국의 자취를 밟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반가웠다. 그만큼 러시아를 몰랐다. ‘제3의 로마’를 자처하는 러시아지만 이제 러시아에는 ‘비잔티움’이 없다. 비잔티움은 ‘새로운 로마’에서도 단절되었다. 더욱이 모스크바를 버리고 떠나온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더 여의치 않다(19세기 말에 지어진 ‘피의 구원 성당’에서 러시아 제국 시대의 비잔티움 양식을 그나마 엿볼 수 있다.) 표트르 대제가 동방의 분위기를 털어버리고 최대한 서구의 의복으로 이 도시를 치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동방의, 슬라브 민족의 보다 신비적이고 관조적인 삶의 양식에 젖어있던 도스토예프스키도 이 도시의 괴리가 그토록 못마땅하고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1510년에 프스코프의 수도자 필로테우스(Philotheus)가 황제 바실리 3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력했던 바는 모스크바에만 해당되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우리 통치자인 동방교회 제국 황제에 관하여 몇 마디 덧붙이자면, 그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황제이고 로마나 콘스탄티노플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축복받은 도시 모스크바에는 존재하는 사도적 교회의 지도자이다. 모스크바는 홀로 태양보다도 더 밝게 온 세계를 비추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교 황제들은 타락하였고 그들을 대신하여 우리 제국의 통치자만이 홀로 남아있다. 두 로마는 타락하였으나 제3의 로마는 서있고 제4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문장에 쌍두독수리가 있기는 하지만 이 도시는 많은 면에서 러시아의 과거와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향하고 있었다. 도시의 창조자 표트르 대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태세로 사방의 문을 열었다. 심지어 정교회에서 금지하던 조각상도 도시 곳곳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1747년 처음으로 라스트렐리의 기마상이 세워지고, 1782년에는 그 유명한 팔코네의 <청동기마상>이 탄생했다. 이 도시는 무수한 형상으로 꾸며져 피그말리온의 꿈같은 만신전이 되어 갔다.
그럼에도 그들의 정신에 흐르는 음울한 유전자는 개선될 기미가 없었다. 사람들은 러시아인들의 정신에서 광활한 자연이라는 환경으로부터 비롯된 원시적이고 이교적인 요소와 비잔티움에서 이어진 피안의 세계를 향한 금욕주의를 발견한다. 그것은 늘 충돌하며 러시아인들의 특유한 정서를 만들어냈다. 러시아정교회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든 비잔티움 제국의 운명까지 이어받은 것처럼 보였다. 이 제국의 종교는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일상 속속들이 스며들어 지배했다.
빵집 주인은 빵값을 말하는 대신 성부가 성자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환전상은 돈을 바꾸어주는 대신 ‘인간의 아들로 태어난 자’와 ‘신처럼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자’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고, 목욕탕에 가면 목욕탕 주인이 성자는 무에서 생겨난 게 분명하다고 장담한다.
《유럽의 형성》에 인용된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의 글로, 비잔티움의 신학적 소동을 묘사한 내용이다. 이처럼 떠들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러시아 사람들 역시 종교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황제 알렉세이(재위 1645-1676)의 일과는 새벽 네 시 개인기도부터 시작되어 이콘 경배, 성경 읽기 등으로 하루가 지나갔다. 특히 사순 시기에는 금식은 물론이고 매일 5시간씩 성당에 나가 선 채로 십자성호를 그으며 상반신을 숙이는 절을 천 번 이상 하였다고 한다.
첫 성인이 된 보리스와 글렙이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인들의 우밀레니에는 어떤 고통이라도 참고 견디도록 요구했다. 그런 와중에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해보자며 시도했던 니콘(모스크바 총대주교, 재위 1652-1666)의 개혁은 더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가 되고 말았다. 니콘의 개혁은 단순히 ‘전례’ 일부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뼛속 깊이 박힌 조상들의 신앙을 버리라는 요구가 되어 버렸다. 성호를 두 손가락으로 긋느냐 세 손가락으로 긋느냐 등의 문제가 존재의 이유, 정체성의 부정이 되는 일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고 조상들을 부정하고 신앙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니콘 자신이 파문당하고 수도원에 유폐되어 불행한 죽음을 맞은 것처럼 러시아인들의 정신에도 비극적인 여파가 휘몰아쳤다. 그의 전례개혁에 그토록 뜨겁게 저항하던 이들은 2만여 명이 스스로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하고, 그 후로도 350년 동안 불화하며 자신들의 신념을 고수했다. 애초엔 구교도라고 불리기도 하고 분리파라고 불리기도 한 이들이 러시아인들의 음울에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러시아 니힐리즘과 러시아적 성격의 종말론적 성향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연결은 분리파 정신의 극단적인 형태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허무주의적이고 종말론적인 경향들, 영혼의 벌거벗음에 대한 동경, 역사의 과정과 문화적 가치에 대한 부정, 모종의 최종적인 파국에 대한 기대는 분리파의 심리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350년이 지난 지금 푸틴이 구교도의 수장이었던 아바쿰 사제의 조각상을 세우는 등 마침내 화해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제 와 그 세월은 어쩌란 말인가. 허무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또한 너무 슬픈 일이다. 러시아라는 나라, 러시아라는 이름의 살얼음 같은 뉘앙스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얼음을 스치는 바람. 영혼을 스치는 우울. 그것은 허무다. 어떻게 허무가 아니겠는가. 신은 사랑을 토로하는데 인간들은 어이없게도 자신들의 생을 파멸시키곤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이 일의 기억이 없다. 이 도시는 이 슬픈 일이 얼추 지나간 후에 생겨났다. 표트르 대제는, 구교도의 수장으로서 니콘의 개혁에 극렬하게 저항하던 아바쿰 사제가 추방과 박해를 반복하다 기어이 화형에 처해진 1682년 제위에 올랐다.
그러니까 러시아는, 무척 무서웠고 무척 슬퍼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