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균형 Nov 19. 2022

영롱한 시선


    날이 꽤 춥다. 통창으로 꾸며진 카페 안에서 자꾸 멍을 때린다. 글을 써야 하는데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남들이 보면 혼자 앉아서 뭐하나 싶을지도. 그런데 멍 때리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팽팽 돌아간다. 이 문단에 필요한 에피소드가 어디에 있나 시간별 장소별로 샅샅이 훑는 중이다. 그러다 한 지점에 머물렀는데, 이 문단과 그때의 상황이 잘 맞는지 보려면 우선 써 봐야 한다. 이제 생각만으로는 글의 앞뒤가 잘 맞춰지지 않는다. 쓰다 보면 내용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종종 주제가 바뀌기도 하고, 암튼 그러하다.  


    보이지 않게 머릿속에서 홀로 싸우고 있는 와중에 창 밖의 한 나무에 시선을 빼앗겼다. 창 밖에는 어느새 비가 내린다. 구름이 드리워져 날이 흐려졌는데, 구름 사이로 저 나무에만 햇볕이 비치고 있다. 나무는 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데, 햇살을 받은 나뭇잎이 예쁘게 반짝거린다. 가지마다 진주를 대롱대롱 매달아 살랑살랑 흔드는 것만 같다. 꽤 먼 거리에 있는데도 나뭇잎에 비추인 햇빛에 눈이 부시다. 눈을 반쯤 감고 시선을 떼지는 않는다. 이 장면을 놓칠 수 없다. 자연의 아름다운 순간은 그 찰나에만 향유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온도, 햇빛, 습도, 등 이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맞추어져야만 누릴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장면이다. 꼭 무지개와 같다. 무지개는 우리가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온과 습도와 햇빛의 삼박자가 맞춰져야만 빛의 스펙트럼을 찬란하게 펼쳐 보이지 않는가.  


    써야 하는 글을 비록 다 쓰지는 못했지만, 대신 늦가을의 볕이 비구름 사이로 선사하는 반짝임을 보았다. 할 일을 잠시 미뤄두고서라도 나는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을 적어야겠다. 쓰지 않으면 잊힐 이 사소한 순간의 기쁨을 기억해야지. 진주 같은 순간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삶의 영롱한 시선을 절대 놓치지 말아야지. 약속한 시간이 지나면 나를 기다리는 두 아이와 남편에게 돌아가야 한다. 자연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나의 남편과 아이들은 진주보다 더 찬란한 존재들이다. 내가 글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그들을 꼭 안아줘야지. 오후에 비가  곧 그치면 아이들과 저 나무가 있던 곳까지 꼭 산책을 해야지.

이전 04화 아무래도 괜찮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