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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균형 Dec 11. 2022

올해의 소비상

feat. 결말을 알 수 없는 전개


  복직을 앞두고 출근을 위한 정장을 한벌 사러 집 근처 아웃렛에 다녀왔다. 날씨가 꽤나 좋은 날이었기에 온 가족이 모두 나들이 겸 나갔다. 그것도 잠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두 아들 덕분에 조용한 쇼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빠가 안아주는데도, 옷만 입으러 들어가면 우는 둘째와, 어디로든 튈 준비가 되어있는 첫째를 데리고 우아한 쇼핑은 불가능했다. 결국 친정엄마까지 합세하여 입에 과자를 물려 층을 빙글빙글 도는 틈에 다행히도 마음에 드는 옷을 살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니트도 사고, 바지도 사고 이것저것 사고 싶은데,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 두 망아지가 문제였다. 아직 애들 데리고 쇼핑은 사치다. 아, 아들 데리고 쇼핑은 내 인생에 없을 일인지도 모르지. 잠시라도 기다려준 아이들에게 보상도 할 겸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여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신랑과 친정엄마는 망아지 한 마리씩 유모차에 실어 집으로 산책 겸 걸어가셨다.

  나는 차를 가져가는 담당이었는데,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길 사이에 특가 할인 코너가 눈에 띄었다. 고가의 브랜드 옷을 80~90% 할인한다.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워낙 할인폭이 커서 제대로 걸린 옷은 없고 매대에 널브러져 있는 옷들 뿐이었다. 매대에 놓인 남성 옷을 발견했다. 겨울에 입기에 괜찮은 옅은 체크남방이 있었다. 한 남자가 입고 와이프에게 보여주는 걸 곁눈질로 보았는데 나쁘지 않았다. 아마 우리 신랑한테 더 어울릴 거야. 항상 입는 신랑 사이즈는 너무 커 보이는데, 그렇다고 하나 작은 사이즈를 사자니 자신이 없었다. 나와 체격 차이가 크지 않은 신랑의 품을 상상하며 내가 대신 입어보았다. 신랑 티셔츠를 입었던 기억을 짜내어 대충 품을 고르고 하나 작은 사이즈로 데려왔다. 특가 할인이라 교환, 환불은 안된다고 하는 점원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결제했다. 금방 산다고 샀는데, 그래도 시간이 꽤 걸린 모양이다. 집에 오니 신랑이 먼저 와 있다. 내 옷을 벗기도 전에 옷을 주섬주섬 꺼내서 신랑에게 입혀본다. 맞춤복 인양 사이즈가 딱 맞다. 만세.


[마음의 소리]

그러니까 글이 길어졌는데, 올해 가장 잘 소비한 것은 글쎄 신랑의 겨울 남방인 건가. 그런데, 이 소비를 통해 내가 얻은 것은 없다. 고맙다는 신랑의 미소 정도..? 그래도 올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소비임에는 틀림이 없다. 물욕 없는 남편과, 필요를 남편보다 먼저 캐치해 사이즈까지 완벽하게 맞추어 사는 아내. 아, 이렇게 글로 표현하고 보니 더더군다나 별로인 소비였군. 네 옷은 네가 좀 스스로 사면 안돼?라고 오히려 외쳐야 할 지점 같은데,
뭘 잘못 먹었나.ㅋㅋ​



  일단, 시작을 했으니 계속해서 글로 표현하며 정리를 해 보자면,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식이라는 행위를 한다고 바로 부부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두 성인남녀가 한 가정을 이루기로 약속하고 둘만의 환경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꽃길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아마 가시밭길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이 날은 우리가 꼭 부부공동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당신의 필요를 생각해 내며, 당신을 위해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마음의 소리]

내 필요는? 내 필요는 스스로 채우는 것이 내 성향이라, 나의 필요를 신랑이 생각해내어 채워주려 한들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가만히 내가 하는 대로 두는 것이 오히려 채워주는 것이다...

아니 뭔가 쓸수록 이 부부공동체에서 내가 손해(?)라는 생각이 자꾸 들기에, 성급히 결론을 지어보자면, 올해 가장 잘 소비한 것은 신랑의 겨울 남방인데, 90%의 할인율로 신랑에게 생색을 낼 수 있었기에 잘 소비한 품목임은 분명하고, 가장 인상적인 소비였다...​



한참을 생각해내어 꺼낸 소비품목인데,

생각만 할 때는 아주 좋은 글감이라고 생각했으나,

쓰다 보니 말려, 뭐가 좋은 건지 헷갈리게 된 것으로 보아,

올해 소비는 성공적이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결론으로...


글 쓰는 재미는 이런것이쥬.

결말을 알 수 없는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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