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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14. 2015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에게

어딜 가나 거들먹거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기실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데도 자신이 무슨 대단한 사람인 양 무게 잡는 사람을 가끔 본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바로 그러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당시 양반들을 풍자하여 양반전을 썼다. 그는 양반을 책 줄이나 좀 읽었다고 부와 명예와 권세를 독차지하려는 아무 쓸모 없는 좀벌레같이 여겼다. 실학파들은 조선 시대의 신분제도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신분제도를 혁파할 힘은 없었지만, 신분이 주는 차별을 뛰어넘어보려고 애를 썼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 강진으로 귀양 갔을 때 머물 곳이 없었다. 천주교로 낙인 찍힌 몸 - 요즘 말로 말하면 사상범을 가까이할 사람은 없었다. 그때 변두리 주막집 한 노파가 그를 불쌍히 여겨 봉놋방(주막집 대문 가까이 여러 사람이 합숙하는 방)에 머물게 하였다. 하루종일 말 상대 없이 홀로 있는 정약용에게 가난한 주막집 노파만이 유일한 말 상대였다. 정약용이 그의 형 정약전에게 쓴 편지에 대화 내용 한 토막이 나온다. 


주막집 노파가 먼저 말을 건다. 

“나으리께서는 글을 많이 읽으신 분이니 감히 여쭙습니다. 부모의 은혜가 같다고는 해도, 제가 보기에는 어미의 수고가 훨씬 더 큽니다. 그런데 성인의 가르침을 보면 아버지는 무겁고, 어머니는 가볍게 여깁니다. 성씨도 아버지를 따르고, 상복도 어머니는 더 가볍게 입습니다. 친가 쪽은 일가라 하면서 외가는 일가로 치지도 않고요. 왜 그렇습니까? 너무 치우친 것이 아닙니까?"

“아버지께서는 나를 낳아주신 분이 아닌가? 그래서 옛 책에서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무겁게 여기는 것일세. 어머니의 은혜가 깊기는 해도 천지에 처음 나게 해주신 은혜가 더욱 중하기 때문이네."

“제 생각은 다릅니다요. 초목으로 치면 아버지는 씨앗이고, 어머니는 땅이겠지요. 씨를 뿌려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야 힘들 게 뭐 있겠습니까. 하지만 땅이 양분을 주어 기르는 공은 아주 큽니다. 아무리 그래도 조를 심으면 조가 되고 벼를 심으면 벼가 됩지요. 몸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은 모두 땅의 기운이지만, 마침내 종류는 모두 씨앗을 따라갑니다. 옛날 성인께서 가르침을 세워 예를 만들 적에 아마 이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요? 제 생각이 그렇습니다."

“할멈! 내가 오늘은 크게 배웠네 그려. 자네 말이 참 옳으이.”(삶을 바꾼 만남. 정민지음, 문학동네, 33쪽)


정약용은 그때 큰 깨달음을 얻는다. 배운 것은 하나도 없지만, 삶의 현장에서 깨달은 한 천한 노파의 말에 머리를 숙였다. 아무리 귀양 왔다지만 말 상대로 삼을 수도 없는 주막집 노파와 말을 나눈 것 자체가 신분의 벽을 넘었고, 또 그 앞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이 고개를 숙인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남존여비의 사상에 찌든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서 정약용은 자신을 반성한다. 전에도 그러했지만, 귀양 온 이후로 일반 백성들의 삶을 더욱 자세히 돌아보고 그들 가운데서 얻은 지혜로 그는 무수히 많은 책을 썼다. 다산의 훌륭한 점은 바로 이와 같다. 


오늘날에도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라를 이끌 훌륭한 지도자들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 배웠다고, 조금 가졌다고, 조금 권세 있다고 거들먹거리며 고개 숙일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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