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 주애가 독일 뮌스터 대학원에서 국제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독일도 국제학은 영어로 강의하기 때문에 독일어에 대한 부담이 별로 없어서 독일어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서울의 괴테 하우스에서 한 달 독일어를 공부한 게 전부다.
독일이 아무리 독일어를 쓴다 하더라도 영어는 웬만큼 통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웬걸 독일에 도착한 첫날부터 주애는 심각한 난관에 빠지게 되었다.
집을 구하느라 뮌스터 시내를 온종일 돌아다니는데 독일인들이 뜻밖에 영어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아니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류를 준비해야 할 것이 있어서 뮌스터 시청에 들려 직원에게 말했다.
“Kannst du Englisch sprechen?”(영어 할 줄 아세요?)
그러자 직원이 말하길 “응 영어 할 줄 알지. 그런데 넌 독일어로 말해야되."
주애는 한 마디로 어이 상실이었다.
사실 독일인들의 무뚝뚝함은 정평이 나 있어서 처음 독일을 방문하는 외국인으로서는 인종차별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묘한 것은 장사하는 분들이나 자기들이 유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영어를 사용하거나 융통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보험 하는 사람들은 둘째 딸의 편의를 잘 봐주었지만, 둘째에게 뭔가를 베풀어야 하는 공무원들은 매우 고답적이었다는 사실이다.
하긴 그런 태도를 인종차별이라 보긴 어렵고 오히려 공무원들의 관료적인 모습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요즘 구 동독 지역에서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뉴스를 통해 종종 접하게 된다.
독일 법원은 지난 15일, 전 나치 친위대 아우슈비츠 수용소 회계원으로 일하던 94세 오스카 그뢰닝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그리고 16일에는 92세 전 나치 수용소 간수가 1,075명의 학살을 도운 죄로 독일 검찰에 기소되었다.
나는 오늘 그 뉴스를 보면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인종 차별한 과거를 철저히 청산하면서 두 번 다시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독일의 양면성을 본 것이다.
뉴스만 볼 때는 독일은 매우 양심적이고, 인종차별과는 거리가 먼 국가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가 있는 동양인들이 겪는 차별은 조금은 있는듯 하다.
뉴스와 현실의 괴리감이 주는 충격은 나를 슬프게 한다.
얼마 전 무한도전에서 일본의 우토로 마을을 방문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토로는 차별의 상징과도 같은 마을이다.
식민지 지배 때 부터 우리 민족을 수탈하고, 강제 동원하여 착취하고 괴롭힌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질 일이다.
그런데 일본에 가 보면 놀랍게도 사람들이 너무나 친절하다.
속이는 사람도 없고, 바가지요금도 없고, 영어를 못해서 그렇지 외국인에 대해서 너무나 친절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본 모습이 아니다.
아베는 집단 자위권 법을 통과시켜 다시금 외국에 군대를 파견할 법적 근거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과거사에 대한 청산 없이 패전국의 지위에서 탈피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일본은 너무나 전투적이다.
그들은 겉과 속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땅에 머무르고 있는 외국인들은 특별히 동남아시아인들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외국인 대표들을 만나 그들의 애로사항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교회의 사무엘 목사도 필리핀 대표로 청와대를 방문하였다.
어려운 점이 있으면 솔직히 말하라는 대통령의 권면에 순진한 사무엘 목사는 말했다.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필리핀 노동자들을 단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건의였다.
일요일이 유일한 휴일인데 그날 세관원들이 특별 단속한다고 교회 앞에 나와 있으니 신앙생활도 못 하고, 자유롭게 다니지도 못하고 공장 기숙사에 갇혀 지내는 불편함을 호소한 것이다.
대통령은 당장 바로잡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하였다.
세관에서 사무엘 목사를 호출하였다.
나는 사무엘 목사와 함께 세관에 갔더니 진술서를 쓰라 하며, 어떤 조처가 내릴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사무엘 목사는 벌벌 떨고 있었다.
필리핀 노동자 교회를 하면서 한국에서 겪는 편파적인 차별 대우는 이젠 일상이 되어 덤덤해졌다.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겉과 속이 다른 것은 똑같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반복하는 말이 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그러나 성경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방 민족에 대하여 차별적 대우를 하는 나라도 없다.
그들은 이방 사람들을 개와 같이 여겼다.
하나님의 법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지키며 산다고 자부하는 그들의 현실이다.
가르침과 현실은 전혀 달랐다.
성경을 가르쳐야 하는 나로서는 언제나 이런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