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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18. 2016

예수님의 치유능력이 떨어지셨나?

마가복음을 읽다 보면 깜짝 놀랄만한 본문을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고쳐주는데 한 번으로 안 되어 두 번에 걸쳐 치료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른 치유 기사에서는 "즉시 나았다"라고 기록하여 즉시라는 단어가 반복되는데 유독 이 본문에서만큼은 "다시 안수하였다."라고 하므로서 다시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다.  (막1:42, 2:12, 5:29, 42, 6:50, 7:35, 9:20,24, 10:52)

예수님께서 벳새다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맹인을 예수님께 데려와 고쳐주기를 구하였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셨지만 맹인의 눈은 완전히 고쳐지지 않았다.

“무엇이 보이느냐?"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예수님은 다시 그의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의 눈이 완전하게 치유되었다.


이 본문은 읽는 사람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만든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이 갑자기 떨어지셨나?

사실 이 이야기는 오직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나는 가지고 있는 주석 10여 권과 다른 참고도서들을 다 읽어보았다.

대부분은 그냥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며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왜 즉각적으로 고치지 않으시고 두 번에 나누어서 고쳤을까?

고라신

본문의 앞뒤 구조를 분석하는 몇 명의 학자들은 본문을 해석하려고 나름대로 시도하였다. 

김득중 교수는 본문의 구조에 관심을 가졌다. 

마가는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를 강조하는 본문(막8:14-21)과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 고백(막8:27-30)사이에 이 본문이 있는 것은 의미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Lightfoot이 주장하는 바대로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여는 사건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1) 

3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고, 기적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보같은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답답하신 주님이 제자들의 상태를 빗대어서 이런 기적을 베풀었다. 

그러니까 소경이 눈을 단계적으로 뜨듯이 제자들도 예수님에 대하여 단계적으로 깨달아 가는 과정이다. 

학자들마다 그 단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2) 

로이드 존스 목사님 역시 이 점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 본문을 복음적으로 잘 해석하여 설교하고 있다.3)  

가버나움 회당

나는 이스라엘을 다녀온 후부터 성경에 나오는 지명들을 볼 때 그냥 무심코 지나치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훌륭한 학자들의 구조적인 분석과는 조금 다르게 이 사건이 벌어진 벳새다를 중심으로 지리적인 시각으로 본문을 해석하고 싶다. 

벳새다는 베드로와 요한의 고향으로서 예수님이 자주 들렸던 곳이다. 

사실 벳새다와 가버나움, 고라신은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 이웃 동네로서 예수님이 애정을 두고 활동하셨던 곳이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에게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며(마4:13) 5명의 제자(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를 부르신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마을을 다니시면서 많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고 가르침을 주었다. 

가버나움에서는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셨으며, 혈루증 앓는 여인을 낫게 하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지붕을 뚫고 내린 중풍 병자를 고치셨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여 주었다. 

벳새다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 

고라신에서도 많은 이적을 보여주셨지만, 성경에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마11:21) 


그런데 소경이 눈을 떴지만 뭔가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마치 갈릴리 여러 마을이 주님을 따르는 것 같지만 온전히 회개하고 따르지 않는 모습과 흡사하다. 

예수님은 그러한 갈릴리 마을을 바라보시며 한탄하시듯 말씀하신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11:21)

애정이 있었던 동네였던 만큼 실망이 더 컸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자신의 답답함을 수차례 호소하였다.(막4:13, 6:52, 7:18, 8:16-21)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막8:17-18)


그러니까 맹인을 단계적으로 고쳐주는 기적을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깨우치는 단계로 학자들이 보았다면, 나는 좀 어뚱하지만 본문의 의미를 지리적인 시각으로 보고싶다. 

예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갈릴리 마을들(가버나움, 벳새다, 고라신)에 많은 기적과 능력을 베풀었지만, 저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았다. 

그 이후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 올라가셔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확증하시고, 십자가를 지시려고 남쪽 유다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셨다. 4)

기적과 능력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것이 바로 갈릴리 여러 마을에서 행한 사역의 결론이다. 

이제 진정한 변화 -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신다. 

그러므로 첫 단계는 갈릴리 여러 마을의 기적이라면, 그 다음 단계는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해석하고 싶다.  

십자가의 보혈이 아니면 갈릴리 고향 사람들뿐 아니라 그 어떤 누구도 예수님을 온전히 볼 수 없다. 


주(註)

1) 복음서의 이적 해석, 김득중, 컨콜디아사, 136쪽 이하 

2) 김득중 교수는 갈릴리에서의 제자들의 어리석고 둔한 모습을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서야 제대로 된 신앙고백을 하게 됨으로 단계를 나눈다. 

강일상 목사 - 첫 단계는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지만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고 그다음 단계로 변화산에서야 비로소 온전히 깨달았다고 보았다.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 강일상, 대한기독교서회, 449쪽 이하)

심상법 교수 -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했지만,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온전히 알지 못하고 가로막았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첫 단계이고 예수님 부활 후에야 온전히 깨달았으므로 그것이 두번째 단계로 보았다.

3) 영적 침체, 로이드존스, 새순출판사, 55쪽 이하

4) 예수님은 왜 가이사랴 빌립보까지 가셨을까? 

5) WBC 마가복음 주석 상권, 로버튜 귤리히, 솔로몬, 6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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