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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26. 2016

그만 둘 수 없으니 사랑이다.

영화 '싱스트리트(Sing Street, 2016)'를 보고서

"삶이 힘겹고 짐이 무거울 때

홀로 있어라. 침묵 속으로 들어가라.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여라. 캐묻지 마라.

다만, 나타날 소망을 기다려라

고난으로부터 달아나지 마라. 정면으로 맞서라

우리에게 최악의 상황이란 없다.

왜 그런가! 주님은

한번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애3:28-31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


며칠 동안 마음에 몸살을 앓았다.

갑자기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다.

매일같이 쓰던 글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멍하니 있을 수 없어서 몸을 혹사시켜 보았다.

온종일 자료 정리를 하면서 컴퓨터 자판을 두들겼다.

생각 없이 TV를 보며 깔깔 웃어도 보았다.

오랜만에 수다도 떨어보았다.

힘을 내보려고 애써 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싱 스트리트(Sing Street, 2016, 존 카니 감독)라는 음악영화를 보았다.

주인공인 코너(Conor)는 파산한 아버지 때문에 더블린의 초라한 학교로 전학을 간다.

학생들은 공부에 아무런 뜻도 없고 그저 마지못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학교에서 왕따 당하던 코너는 우연이 모델을 꿈꾸는 어여쁜 ‘라피나’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 앞에서 잘난척하고 싶어 ‘밴드’ 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그날부터 밴드를 만든다.

엄마는 바람이 나서 부모는 날마다 싸우고 이혼 직전까지 가는데 코너의 유일한 탈출구는 밴드였다.

여주인공 라피나(Raphina) 역시 암담하긴 마찬가지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죽고, 우울증에 걸린 엄마는 병원을 들락거린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고아처럼 혼자 사는 라피나는 막연히 런던에 나가 모델이 될 꿈을 꾼다.

어둡고 차가운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코너의 노래는 아름답다.

슬픔에 익숙해지면 슬픔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모두 꿈을 포기하고 삶에 지쳐 주저앉아 있을 때 코너는 희망을 노래한다.

그의 노래에는 슬픔이 절절히 묻어 있지만 경쾌하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에게 형벌을 내리시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의 문만은 닫지 않으셨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의 삶은 수고와 눈물로 이어진다.

삶의 모퉁이마다 위험과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전쟁이고 고통이다.

희망마저 없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살까?

육체의 피로는 우리의 마음을 공격하지만, 절망은 우리의 영혼을 공격한다.

비록 희망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희망이라도 있어야 오늘을 버텨낼 수 있다.

희망은 삶을 유지해주는 생명력이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이런 말을 한다.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It is silly not to hope, It is a sin.)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보며 탄식한다.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치는 예레미야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현실은 참담하였다.

나의 원수들이 이유 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도다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애3:52-55)

그의 애가는 눈물로 가득하다.

그런데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예레미야는 희망을 노래한다.

기독교의 희망은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느껴지는 그 순간 구원을 소망한다.


일반적으로 희망이 크면 클수록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도 커져만 간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 인간은 갈등하게 된다.

다시 시작해봐?

크게 눈을 떠 보지만 사방은 어두컴컴하고 절망은 죽음의 사자처럼 다가온다.

이대로 쓰러질 수 없다 생각하여 다시 일어나 보지만, 인생은 절대 만만치 않다.


그러나 기독교의 희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다.

기독교의 희망은 희망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인간에게 희망을 허락하신 하나님에게 향한다.

시인은 노래한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나이까?

나의 희망은 당신, 당신에게만 향해져 있나이다.”(시39:7)

역사 위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곧 내일의 희망으로 연결된다.


그렇다고 기독교인은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두 손을 놓는다는 뜻이 아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것처럼 “고난으로부터 달아나지 마라. 정면으로 맞서라. 우리에게 최악의 상황이란 없다. 왜 그런가! 주님은 한번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그의 책에서 영생을 이렇게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영생을 무한한 생명의 연장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생은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삶을 의미하며 그것은 이미 우리의 현실에서 시작되었고 장차 완성될 것이며 죽음을 포함한 그 어떤 것으로도 망가뜨릴 수 없는 삶이다.

영생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포기란 없다.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만약 삶에 의미가 없다면, 다른 말로 말해 삶에 희망이 없다면, 그의 움직임은 마치 코마(coma) 상태에서 무의미한 발작과 경련을 하는 것과 같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람 안에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독일 나치 정권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에론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는 절망하였다.

독일이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려가는 것과 같은 핏줄인 유대인들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무수히 많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어떤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

그는 ‘희망의 원리’라는 방대한 책에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문제는 희망을 배우는 일이다."

희망이 없다면 인간은 살 이유가 없다.

희망은 체념과 단념을 모르며 실패보다는 성공을 사랑한다.

상황이 최악이라고 해도 포기하지 마라!

싱스트리트에서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간다 할지라도 희망을 포기하지 마라.

싱스트리트의 "go now"라는 노래가 아직도 잔잔하게 내 마음을 만지고 있다.

오늘은 성경 말씀만큼이나 한 편의 영화가 나에게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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