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를 읽다 보면, 퇴계가 주장한 이기이원론과 율곡이 주장한 이기일원론을 만난다. 같은 성리학자이면서도 각자 논점이 달라 싸우는 모습에 머리가 아프다. 그들의 주장을 풀어보면 이렇다.
성리학은 모든 만물이 이(理)와 기(氣) 두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이(理)는 존재의 본질이고 기(氣)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요소다. 서양식으로 생각하면 이(理)는 이데아이고 기(氣)는 사물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이(理)는 영이고 기(氣)는 육이다.
퇴계는 플라톤처럼 이(理 - 이데아, 영혼)는 중요하지만, 기(氣 - 육, 현상 세계)는 열등하다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율곡 이이는 이기(理氣)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보았으며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각자의 사상에 따라 퇴계는 현실에서 물러나 마음 수양에 힘을 썼고, 율곡은 현실 정치 세계에 뛰어들어 세상을 바꾸어 보려고 노력하였다. 둘 다 성리학을 믿고 따르지만, 미묘한 관점의 차이로 둘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까지 당파를 만들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였다. 전통적으로 조선 유학은 퇴계 쪽으로 기울어 마음 수양에 역점을 두지만, 일부는 율곡 사상을 이어받아 현실 개혁을 추구하는 실천 철학을 강조한다.
대학 다닐 때 최홍석 교수에게 인간론을 배웠다. 장로교는 기본적으로 영 육 이분설을 따른다. 최홍석 교수가 이분설을 한참 설명하는 도중에 나는 손을 들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당시 나는 히브리 사고와 헬라 사고의 차이점에 대한 책들을 읽던 중이었다. 히브리 사고는 종합적이지만, 헬라 사고는 분석적이다. 구약성서의 인간학'을 쓴 한스 발터 볼프(Hans Walter Wolff)에 의하면 셈족 언어는 인간을 영, 혼, 육으로 분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서로 동등하게 사용하며 때로 교차하여 사용한다. 시편 저자는 마음과 육체와 영혼을 동등한 뜻으로 사용한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2) 반면에 헬라어는 그 언어적 특성 때문에 분석하고 분리하여 설명한다. 인간도 분석하여 분해하고, 사랑도 분석하여 여러 단어(아가페, 에로스, 필리아, 스토르게, 에피투미아)로 나누었다.
나는 인간론을 이분설로만 보지 말고 일원론으로 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하였다. 그때 주변의 친구들이 비웃으며 말하였다. “그건 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이단 사상이야.” 사실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여호와의 증인과는 분명히 다른 이야기인데 친구들은 나를 금방 이단으로 몰아쳤다. 그때 최홍석 교수는 웅성대는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고 말하였다. "우리 교단은 이분설을 따르긴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자 중 벌까우어 같은 분은 배 전도사가 말한 일원론적 견해를 취한다. 배 전도사! 그쪽 분야에 관심이 있으면 벌까우어 책을 구해서 한번 읽어보도록." 벌까우어(G.C.Berkouwer)는 화란 개혁교회의 교의학자로서 아주 건전한 신학자이다. 나는 최홍석 교수의 열린 마음과 태도가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사실 많은 종교인은 자기가 믿는 교리와 입장이 조금만 달라도 마치 원수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같은 교파 안에서도 서로 관점과 견해가 다른 경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칼빈주의 학자라고 해서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모두 조금씩 견해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죽일 듯이 미워하고 감정적으로 대한다면, 그는 꽉 막힌 벽창호이거나 대화 능력이 떨어진 근본주의자임이 틀림없다.
대화(dialogue)는 그리스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을 뜻한다. 대화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각자 자기 관점을 이야기하므로 더 높은 수준의 이해를 얻는 행위다. 대화는 내 생각만 옳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옳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힘써야 한다. 내 입장과 생각을 이해시키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남의 입장과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대화다. 진정한 대화와 소통은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데서 출발한다.
요즘 대화는 곧잘 싸움으로 이어진다. 남이 말하는 것은 듣지 않고 내 말만 하고, 내 고집만 부리다 보니 대화는 이내 논쟁이 되고, 싸움이 되고, 원수가 된다. 물 흐르듯 각자의 생각이 흘러가게 하고, 생각 하나하나가 내 생각처럼 나름의 옳음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대화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많을 것이다.내 생각만 옳다고 고집부리며 모든 사람을 설득하려 한다면, 대화는 이내 단절되고 주변은 적들로 둘러싸이게 된다.
소통하자고 여기저기서 말은 많이 하지만 정작 현실은 불통인 경우가 많다. 나와 조금만 다르면 원수처럼 여기는 분위기에서 소통은 말뿐인 구호로 그치게 된다. 이제 생각의 폭을 넓혀서 나만 옳은 것이 아니라 남도 옳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서로 생각과 관점이 물 흐르도록 만들어야 한다.
“주님! 내가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도록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