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민족학자 레프 야코브레비치 슈테른베르크(1862-1927)는 아무르강 하류에 사는 길랴크족 부락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였다. 그곳 추장에게 보드카 한 잔을 권하였다. 추장은 조금 홀짝인 후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과 돌려 마셨다. 심지어 젖먹이조차 빼놓지 않았다.
전통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이 보는 데서 혼자 뭔가를 먹거나 마시는 것은 큰 실례다. 사냥꾼이 야생동물을 잡으면 친족이나 신분, 지위 등 정해진 분배 기준에 따라 적절한 품질과 크기의 조각으로 나누어준다. 그러나 분배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령 아주 소량일지라도 공동체의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터키 농부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한 사람은 먹고 다른 사람은 쳐다보기만 해야 한다면, 세상이 멸망할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나눔은 생명을 나누는 것이며 동시에 결합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의 계약을 뜻하는 단어 ‘베리트(berit)’가 있다. 이 단어는 ‘음식을 자른다’는 의미를 가진 바라(barah)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축자적인 의미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다지는 결의’ 혹은 ‘잘린 고깃덩어리’이다. 함께 음식을 나누므로 계약 공동체 곧 식구가 된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이제 하나라는 뜻이다.
어떤 유럽인은 에스키모에게 고기 한 점을 받고 고맙다고 했다가 이런 잔소리를 들었다.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어. 뭔가를 얻는 것은 자네의 당연한 권리야. 이 땅에서는 누구도 남에게 신세를 지고 싶어 하지 않네. 그렇기 때문에 선물을 주지도 받지도 않지. 그랬다가는 종속되게 될 테니까. 채찍으로 개를 길들이는 것처럼 선물로는 노예를 만들 뿐이네.”
결혼 초기에 ‘한 셈 치고’ 집사님을 알게 되었다. 집사님은 모든 것을 살 때, ‘한 셈 치고’ 계산법으로 구매하였다. 이를테면 가족이 사과를 먹으려면 10개 정도 사야 풍성히 먹을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집사님은 ‘10개를 사 먹는다’ 셈 치고 5개만 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그날 ‘한 셈 치고’ 사연을 소개한다. “우리가 사과 10개를 먹어야 만족할 만큼 먹겠지만, 사과 5개도 없어서 못 먹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사과 5개는 그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양보하자.” 그는 사과 5개의 값을 ‘한 셈 치고’ 주머니에 넣었다. 어느 정도 돈이 쌓이면 자녀들과 함께 보육원이나 양로원이나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 몸으로 물질로 그들을 도왔다.
집사님은 큰 회사의 이사로 있었지만, 자가용을 사용하지 않고 늘 좌석버스를 타고 출근하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하기를 내가 좌석버스를 탔다 셈 치고 조금만 일찍 일어나 일반버스를 타자. 그리고 버스비의 차액으로 남을 돕는 데 사용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회사 앞에는 육교가 있다. 그 육교에는 소경 거지가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구걸하였다. 그런데 일반버스를 타던 첫날, 버스비 차액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였다. 마침 육교의 소경 거지를 보는 순간, 그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주려다 생각을 바꾸었다.
여기를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이 동전 몇 푼을 던져주고 지나쳤을 텐데 나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그는 얼른 육교를 내려가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우유 하나와 빵 하나를 사서 거지에게 다가갔다. 거지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거지의 손은 굳은살로 투박하였고, 제대로 씻지 않아서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선생님! 이 추운 날 식사도 못 하셨을 텐데 여기 우유와 빵을 사 왔으니 좀 드셔요.”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순간 소경 거지가 눈을 떴다. 똥그랗게 눈을 뜬 거지와 집사님의 눈이 마주쳤다. 놀랍고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착한 선행이 기적을 일으킨 것일까? 짧은 순간 두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생 소경 행세를 하면서 구걸하던 거지는 이렇게 자기 손을 잡아주며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이다. 소경 거지는 놀라움에 그만 눈을 뜨고 말았다. 집사님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오히려 더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라고’ 껄껄 웃었다.
집사님의 처남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한 때 잘 나갈 때는 강남 큰 아파트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다. 그러나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업이 부도가 나서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 앉을 처지가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집사님은 저녁 식사 후 다시 ‘한 셈 치고’ 사연을 나누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60평 아파트에 살면서 편안함을 누렸는데, 처남 가족은 지금 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 우리가 60평에 산다 셈 치고 30평짜리 아파트에 살면 어떻겠냐?”
평소 늘 ‘한 셈 치고’를 실천하는 가족이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후 처남은 사업을 다시 일으켜서 강남 60평 아파트로 이사하였지만 한 셈 치고 집사님은 60평 같은 30평 아파트에서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다.
고대의 지도자(추장)는 반드시 나누는 데 앞장서는 사람이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자기 지위를 이용하여 자기 욕심만 차리는 사람은 결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인간 세포 중에 자기만을 생각하는 세포가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이 암세포다. 암세포는 생체의 생활현상이나 주위 세포와는 상관없이 자기 증식만 계속하여 마침내 생명을 끊어버리는 악성 세포다. 인류 사회에서도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암적 존재이다.
식사 예절은 현대인의 매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대로부터 남을 배려하기 위한 식사 예절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배고프다고 게걸스럽게 먹거나, 더 먹으려고 욕심부리지 마라. 맛있는 것을 먹겠다고 손을 뻗치는 것은 공동체를 생각하지 못하는 큰 죄다. 손톱에 때가 낀 체로 음식에 손을 대는 것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함이다.' 인류는 식사를 통하여 나눔을 가르쳤고, 타인을 배려하는 예의를 가르쳤다. 그렇게 인류 문화는 발전해왔다. 문제는 요즘 식사 교제가 사라지고 있다. 가족 간의 식사도 없어지고, 설령 식사를 같이한다 할지라도 TV를 켜놓고 식사한다. 요즘은 혼자 밥 먹는(혼밥) 풍조가 유행하기도 한다. 식사를 통하여 마땅히 배워야 할 나눔의 정신, 타인을 배려하는 예의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하시고선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고 말씀하셨다. 존 하워드 요더는 이날 저녁 식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일상적으로 먹던 음식이었다고 주장한다. 주님은 일상의 식탁이지만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담으셨다. 주님은 식사하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하셨다. 그냥 먹고 마시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 자리는 다른 사람을 돕고 구원하기 위하여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나누는 자리였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배워야 할 예절을 가르쳤다. 그런데 오늘 기독교는 배워야 할 교훈은 배우지 않고 다만 종교 의식으로 한정짓고 있다.
나는 예수님이 만찬을 통하여 가르치려고 했던 교훈, 즉 희생과 나눔과 배려를 배울 때 그 만찬이 진정한 거룩한 만찬(성만찬)이 된다고 믿는다.
참고도서
1. 배철현, '인간의 위대한 여정', (21세기북스;서울) 2017년
2. 클라우스 E. 뮐러, '넥타르와 암브로시아', 조경수 옮김 (안티쿠스;서울) 2007년
3. 크리스토퍼 스미스, 존 패티슨, '슬로처치', 김윤희 옮김 (새물결플러스 ; 서울) 2015년
4. 김종철, '이스라엘에는 예수가 없다', (리수;서울)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