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6개월 되던 때 쓴 글
아버지가 떠나간 지 이제 만 6개월이다. 아버지는 친절하게도 나와 이별 연습할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치매 병원에서 2년을 지낸 후 중환자실에 들어간 후 사람을 알아 보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천천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막냇동생의 떠남은 정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다가왔다. 이른 아침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막내가 죽었다!
명동에서 칼국숫집을 크게 하던 막내는 매일 새벽 그날 하루 장사할 김치를 담갔다. 그날도 김치를 담그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졸면서 운전했는지 차는 인도 위 가로등을 박았다. 목격자의 증언으로는 운전석에서 나와 차의 부서진 정도를 확인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내 쓰러졌다. 나중에 병원에 도착하여 동생의 장기를 기증하려고 하였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내장이 충격으로 산산이 부서졌다고 한다. 기증할 수 있는 장기는 하나도 없고 겨우 안구만 적출하여 기증하였다. 입관하기 전, 시신을 염하는 데 나는 통곡하였다. 온 몸이 퉁퉁 불어 있는 동생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안구를 적출한 눈은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동생의 모습은 우리 온 가족을 오열하게 하였다. 그렇게 동생은 우리에게 큰 슬픔을 남기고 떠났다.
아버지는 동생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막내동생을 끔찍이도 사랑하였던 아버지로서는 의외의 모습이었다. 비록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딱히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정말 아버지의 인내력과 절제는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건 아버지의 겉모습일 뿐이었다.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아버지는 그날부터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의 치매는 막냇동생의 떠남과 함께 시작하였다. 사랑하는 아들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의 마음은 그렇게 서서히 무너졌다. 겉으로 표시를 내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슬픔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나 보다. 나도 딸 아이의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가끔 혼자 눈물짓곤 하는데, 아들을 떠나 보낸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하랴. 거대한 산과 같던 아버지는 점점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정신을 놓게 되고 평소 늘 유지하였던 품위를 잃어버리셨다.
"목사는 국제신사야.” 하면서 언제나 정장을 고집하신 아버지다. 목욕탕에 갈 때도, 등산할 때도 정장차림이었다. 집안에 갑작스럽게 손님이 찾아와도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반드시 정장을 갖춘 다음에 만나던 아버지였다. 머리는 포마드 기름으로 단정히 빗어넘기고, 정장에 딱 맞는 구두를 신던 아버지였다. 한점 흐트러짐이 없던 아버지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아주 평범한 노인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이별 연습하듯이 급격하게 몸이 나빠지고 그때마다 우리는 급히 응급실과 병원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아버지는 우리에게 마지막 갈 때까지 상실의 충격, 이별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려고 하셨다. 아버지도 떠나셨다.
아무리 연습을 했어도 상실의 아픔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난다. 수년 동안 내 곁을 떠난 동생 생각 때문에 가슴 아파하던 그 자리에 아버지가 대신하고 있다. 비록 아버지는 내 곁을 떠났지만, 내게 남겨준 아버지의 말씀은 위기 때마다 빛을 발한다. 그때는 잔소리 같았고, 듣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교훈이 오늘도 살아서 내 귀에 쟁쟁하다.
"아들아! 사자같이 담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