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조일지

정직한 단상, 불실한 소설

by 노D


셋이 아닌, 서른셋이었다. 셋이면 마당에서 돌멩이로 수제비 흉내라도 낼 테지만, 서른셋이면 슬슬 보일러 필터 교체 주기를 외워야 할 나이다.


집 계약이 만료가 되는 시점, 나는 가상의 아파트의 이름을 떠올렸다. ‘번영'. 그곳에 살고 싶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왠지 경기도 파주 어딘가였으면 좋겠다. 어렴 풋 상상해 본 건물의 외벽은 바래고 낡은 간판엔 이제 ‘번영' ‘번 o'만 남았고, 나는 그 위에 ‘번-외' 또는 ‘번-아웃'을 끼워 맞춰본다. 상상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어릴 적, 그림을 좀 더 열심히 그려볼걸. 잠시 이 무의미한 유희에 웃어본다.


나는 ‘풋' 하고 웃고 싶은 순간을 이곳저곳에 심어 두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고 지나가겠지만, 나 자신은 걸려 넘어져 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살기로 했다. 유쾌한 지뢰밭. 흑백영화 필름처럼 약간 번지고 부스스한 삶. 과도한 자유를 피해 지상의 기운에 약간 잠겨있는 삶. 진지하기 전까지의 오롯한 착각은 스스로를 귀엽게 만든다. 조금은 진부한 로맨틱은 적당히 해롭다.


핸드폰 스피커에서는 피에로 피치오니의 영화 음악이 옅게 깔린다. 하루를 미련 없이 보내고 싶어도, 시간은 누구도 비켜가지 않을 만큼 자비하고, 모두를 소외시킬 만큼 해박하다. 뛰어오는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고 닫힘 버튼을 연사로 누르는, 엘리베이터 안 암묵적 동의처럼.


차라리 자연을 많이 소비하자. 다 쓴 바디로션처럼 감정도 눌러 짜기엔 양이 모자라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고독을 친구 삼았고, 나는 버스정류장 건너 전깃줄에 앉은 까마귀를 잠재적 동료로 삼는다.


"까악!”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너는 다 감춰서 까맣니, 다 드러내서 까맣니. 반칙이야. 그날 밤 나는 몰래 쓰레기를 내다 버렸다. 내일이 수거일인 줄 뻔히 알면서. 작은 반항이었다. 모든 일정은 나에게 너무 정확히 알려져 있었고, 나는 그중 하나라도 어긋나게 하고 싶었다. 순종적으로 사는 건 일종의 소극적인 오만이다. 나는 겸손한 반항을 선택했다.


알베르 카뮈도 지나치게 많이 생각했다. 나는 생각 대신 저녁 메뉴를 고르기로 한다. 공짜 리뷰 문제는 실존보다 치사하고 맛있다. 비극의 근원보다 배달의 최소 주문 금액이 더 현실적이고, 존재의 허무보다는 할인 쿠폰 유효기간이 더 급박하다. 비극? 글쎄. 요즘 시대에 비극은 무척 비싸다. 누군가 죽어야 하고, 누군가 통곡해야 하고, 누군가는 그걸 찍어야 한다. 나는 외부 세계의 소란스러움보다, 과도한 열심에 간보듯 보답하는 삶이 꾸려가는 이야기와 잘 맞는다. 운명은, 매일 반복되는 어설픔 속에 숨어 있다.


햇빛이 비추는 카페 창 비스듬히 앉아 노트북 화면 빛에 몰두하는 것도, 펑크난 양말을 바로 버리지 못하는 귀찮음도, 꽁지머리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내가 일요일 아침마다 1+1 플레인 요플레를 사가는 걸 지루하면서 신기하게 바라보는 루틴도. 그런 운명이라면, 나는 기꺼이 따라갈 수 있다.


그리고, 엄마를 잠시 없애봤다. 소설에서는 가능하다. 엄마 없이 살아본다. 유년의 궤적에서 손 하나 빼봤다. 그러자 이야기에 더 잘 들어가지는 듯하다. 카뮈,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이방인. (<아가씨>, 박찬욱, 2016 대사 참조)


엄마가 없는 상상을 자주 하곤 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단연할 수 있으니까. 그 사람의 부재를 미리 떠올려보는 건, 나름의 준비다. 우리는 준비할 수 있는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다. 엄마와 마지막으로 나눈 메시지엔 이렇게 적혀 있다. ‘스타벅스 쿠폰 보냈어.’ 오늘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쿠폰은 빠른 소모를 자처하는 친절이다.


반대로, 아빠가 있는 상상을 하곤 한다. 애초에 없었던 사람처럼. 앰프를 개조하던 사람. 온갖 설움을 하이파이 오디오에 이식해 농익은 사운드를 구상하던 사람. 여분의 나사 하나를 손에 쥐고 잠깐 멈칫하다가, 혼잣말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사람. 툭하면 열을 내던 나에게 노브를 살짝 돌려 레퀴엠을 틀어주던 사람. 정작 자신의 감정은 EQ로만 표현하던 사람. 그런 사람을, 있었다고 쳐보는 거다. 잦은 오작동은 있어도 대체할 수 없는 퀄리티를 가진 내성의 테크니션.


셋이 아닌, 쎄쎄쎄.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잘 지내지? 더 이상 엄마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아. 하염없이 아빠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아. 나는 쿠폰과 앰프의 자식이다. 생활력과 사운드 집착의 하이브리드, 마트 포인트를 따지는 손과 볼륨 노브를 돌리는 손 사이에서 자란 아이.


유튜브 릴스의 괴력, 또는 계략. 소화가 잘 되는 방향으로 누워 해학적인 밈을 보며 웃다가, 몇 십 초짜리 릴스 하나에 울컥한다. 노숙자의 과거 영광을 다룬 짧은 편집 영상. 배경엔 슬로우 피아노, 자막은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아무도 듣지 않던 이야기를 '반드시 들어야 할 이야기'로 전환하는, 이타적인 창작자의 공표. 가기도 잘도 간다, 프로파-간다.


프로파간다... 로파간다... 파간다... 파가안다... 파안다... 판다. 프로파간다의 의미를 대나무 먹방으로 거뜬히 대신해버리는, 어느 대륙의 ‘판다'모니엄 (대혼란)... 푸바오 가지마!


피자빵을 데운다. 불룩해진 뱃살을 본다. 귀여운 저주를 퍼붓는다. "그래도 물 위는 잘 떠다닐 수 있겠구나, 이동 중 무리에서 떨어진 철새처럼.”


세탁기에 연결된 호스를 떼고, 굵은 빨대의 모서리로 내 배를 ‘푹' 찌르면, 아무렇지 않게 나의 오래 해먹은 자학의 부산물들이 빠져나갈 것만 같다. 그 찌꺼기들이 배 불뚝 까마귀의 모습을 할 것만 같아. 다 감춰서 검을까, 다 드러내서 검을까.


가끔 웃고 있는 내 사진을 보면, 어릴 적 내 얼굴이 겹쳐 보인다. 아기 유령 케스퍼처럼. 전생에 미워하고 사랑했던 존재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나를 이루던 그 아이. 그 애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냐고,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저렇게 살고자 하는 대안은 있냐고.


훨훨.


잡히지 않는 계절을 향해 방향을 틀며, 나름 똑바로 걷는다. 그러나 때때로 누군가로부터 멱살을 잡히고 싶다. 더 철저하게 붙잡히고 싶다. 나는 번영도, 번외도 피해간 적이 없는데. 힘이 닿는 한 주어진 층을 모두 기웃거리며 살아왔는데.


애써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삶. ‘간’ 보지 않고, ‘간’과 함께 오장육부까지 통째로 기꺼이 건넬 수 있을 것만 같은 삶. 죽음보다 개운해지는 삶. 나를 완전히 벗어나는 대안. 새롭게 읽히는 데미안. 깨진 알을 주워 껍질들을 이어 붙이고 그 안에서 다시 수정란 단계로 초기화되는 원형의 재현.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3:4)


나지막이 불러보는 나의 영토. 나의 땅. 화면 하단에 작게 적힌 자막처럼 조용히 나의 욕망을 번역한 말. 많은 이름들이 적혀 있는 크레딧을 응시하다 ‘풋' 하고 주변에 불이 켜진다. 홀로 앉아 있던 극장에서 퇴장을 압둔 어떤 이의 조금은 서글프고 많이 어설픈 생의 의지가 주섬주섬 바닥에 떨어진 깃털을 주워 담는다.


옥상 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는 사람이 없다.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날개>, 이상, 1936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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