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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몽 Oct 18. 2023

"작가님"이라고 부르지 마세...

직업체험: 드라마 보조작가

JTBC '멜로가 체질'

드라마 <멜로가 체질>을 재밌으면서도 불편하게 봤다. 배우 천우희는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님 밑에서 보조 작가로 일하는 임진주 역을 맡아 코믹하면서 사이다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운빨과 글빨의 조화로 한 번도 실패해 본 적 없는 스타 감독 손범수(안재홍)를 만나 신인 작가 데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담겼다.

     

작품 마지막에 임진주와 손범수가 만든 작품은 흥행하지 못하고 끝이 난다. 찰진 대사와 표현들이 매력적인 작품으로 다시 봐도 웃음이 난다. 만약 작품이 성공했다면 드라마를 보다가 화면을 껐을 것이다.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운이 좋은 경우는 현실에서 드물다. '임진주 작가님, 그래도 너는 데뷔했잖아. 부럽다.'     


글을 쓰는 작가의 종류에는 극작가, 시인, 소설가, 웹소설 작가, 만화가, 웹툰 작가, 동인작가, 방송작가, 스토리작가(만화, 게임), 시나리오 작가 등이 있다. 여기서 드라마 작가는 방송작가이면서 시나리오 작가에 포함되는 직업이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영상 글쓰기는 일반 글쓰기와 결이 다르다. 소설, 희곡 등은 글만으로도 가치를 인정해 주지만, TV 드라마와 영화 등은 영상으로 만들어질 그림을 글로 표현하기 때문에 영상화되지 않으면 ‘쓰레기’가 되는 글이다. 아쉽지만 현실이다.      


보조작가들이 일하는 모습 /JTBC '멜로가 체질'

서른 살에 드라마 작가 지망생을 시작하면서 길이 보이지 않아 하다가 그만두고 다시 하고를 반복하며 여기까지 왔다. 지금 생각하면 서른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 가장 좋은 나이다. 

  

2년 정도 원로 작가님 밑에서 드라마 보조작가로 일을 했다. 보조작가는 지인의 소개로 채용되거나, 아니면 제작사에서 공고를 내고 작가님과 기획 PD의 면접을 통해 사람을 구한다. 작가님과 계약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은 제작사와 계약을 하고 월급을 받는다. 


예전에는 월급 안 받고 열정페이로 일하는 보조작가가 많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런 일도 없으며 그걸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신고하시길. 그 사람은 당신의 꿈을 볼모 삼아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날로 먹으려는 사람이니까.


보조작가로 일을 시작하게 되면 작가님마다 다르지만, 주 2회 출근해서 회의하고 나머지는 재택근무를 하는 편이다. 나도 그렇게 일했다. 사전제작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에는 온에어로 드라마 방영이 되었다. 그러면 보조작가는 메인작가님과 합숙하며 일을 했다. 지금은 달라진 것 같지만, 메인 작가님의 재량이다. 


보조작가의 업무는 아이디어 회의, 회의록 작성, 자료조사, 구성 등이 있는데 글을 더 잘 쓰는 사람들은 대본 작업에도 함께 한다고 들었다. 당연히 그런 분들은 페이가 높은 편이다. 작업에는 시놉시스, 대본 쓰기라는 작업이 있는데 우선 시놉시스가 완성되면 대본을 쓰는 경우가 많다. 시놉시스는 회사에 기획서 같은 것이다.      

드라마를 상품으로 놓고, 상품을 설명하고 왜 이걸 만들어야 하는지 기획하는 작업이다. 대본도 중요하지만, 시놉시스를 통과하지 못하면 대본까지 가기 힘드니 놓치면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작업이다. 일종에 여행을 시작할 때 필요한 지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시놉시스에는 크게는 3가지 정도가 꼭 들어가야 한다. 기획의도, 인물소개, 줄거리. 기획의도는 작가가 왜 이 드라마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작가의 말이다. 작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는지, 주제는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으며 짧은 자기소개서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다음은 인물소개로 극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자세하게 기입하고, 회당 줄거리를 이어서 쓰면 시놉시스가 완성된다. 단막 같은 경우는 회당 줄거리가 없지만, 긴 호흡의 이야기는 회마다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를 적어야 하며 엔딩까지 마무리지어야 한다. 시놉시스 작업이 통과하면 대본 작업에 착수한다. 

     

대략 4회까지 대본을 완성하는데 편성과 제작비 지원을 받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분량이다. 2회까지 있어도 배우를 캐스팅할 수 있다. 유명한 작가님이면 말만으로도 섭외가 가능하겠지만. 


드라마 1~4회는 중요하다. 시청자를 끌어당겨서 볼 수 있게 해야 하니 공을 많이 들일 수밖에 없다. 대본이 나오면 감독님, 제작사, 기획 PD 등의 사람들이 모여서 대본에 회의와 토론이 시작된다.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으며 조율하는 작업이 시작되고 반복된다. 지난한 과정이다. 글 쓰는 과정도 힘들지만, 글에 대한 평가를 받는 것은 고욕이다. 작가의 입장만 낼 수도 감독의 의견만 낼 수도 없다. 


많은 돈은 투자되는 만큼 정말 박 터지게 싸우게 된다. 거기에 배우까지 들어오면 더 심해지겠지만. 모든 의견들을 받아들이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드라마는 2인 3각 경기다. 연출과 작가는 하나의 팀으로 계속 소통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끈끈한 전우애를 가지고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함께 가야 한다. 좋든 싫든 한 배를 탔고, 배를 도착지까지 안전하게 데려가는 선장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신인 작가들이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듣다가 스토리가 산으로 가거나 이상해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신인이기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멘탈 관리는 필수이다. 수용해야 하되 그 안에 자신을 지켜야 한다. 드라마는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엄청난 자본으로 이뤄지는 사업이다. 

 

보조작가로 일할 때는 로맨스 판타지 타임슬립 장르의 원작 소설을 드라마로 리메이크를 했다. 드라마 업계에서 대본을 '책'이라고 표현한다. 대본이 완성되면 배우, 스텝들에게 제본을 해서 책으로 돌리기 때문인 것 같다. 책이 나오기 전에 제작사가 사라지면서 내가 일하던 작업들이 갑자기 올스탑되었다. 편성을 코앞에 두고 드라마가 엎어지고 2년이라는 시간이 통으로 날아갔다.


준비하던 드라마가 빛을 잃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영화, 드라마 형식의 영상 대본들이 생겨나고 사라질까. 현실을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유튜브 채널 '박명수'

“작가님~” 눈알을 쓰윽 굴리며 주위를 살핀다. 드라마 기획 PD가 부르는 소리다. 보조작가로 일할 때 나를 ‘작가님’이라고 불러주셨다. ‘저는 작가가 아닌데요’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라고 할 수도 없고 맞지만 아닌 불편한 호칭이었다. 아이러니하다.


작가님이라고 불리고 싶지만, 여기서 불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직접 쓴 글로 당당하게 ‘작가님’이라고 불리고 싶었다. 전업 작가가 되더라도 작가님이라는 호칭은 어색할 것 같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이래야지’라며 나름의 높은 기준이 있어서인지 쉽지가 않다. 의외로 작가라는 기준은 낮을지도 모르는데 넘어야 하는 편견이다.

    

직업으로 보는 작가는 언제나 매번 하얀 백지를 맞이하는 외로운 직업이다. 많은 직업을 경험하며 대부분의 일들은 시작을 할 때는 품이 들고 힘들지만 익숙해지면 요령이 생겨서 곧잘 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글쓰기는 달랐다. 


특히 드라마 대본을 쓰는 일은 매번 어렵고, 매번 새롭다. 내가 만든 세상에서 내가 만든 캐릭터가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어려웠다. 유명한 작가님은 잘 만든 캐릭터들은 그 안에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며 작가는 그걸 관찰하고 그대로 쓰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런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제가 잘 만든 캐릭터인데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니까. 


드라마 작가는 오랜 시간 간직해 온 꿈이자 나에게 번아웃과 무기력을 안겨주었다. 한참 동안 무기력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근래에 얼굴을 내밀어 다시 글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꺾여버린 마음은 좀처럼 회복이 힘들다. 누군가 꺾이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마음이 맘처럼 되면 모든 게 가능하게. 


오히려 박명수가 말했던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이라고 했던 말이 마음에 더 와닿았다. 수많은 마음들이 꺾인다. 나자빠져서 바닥에 엎어져 일어나지 못한다. 누구 하나 내밀어주는 손이 없더라도 그냥 하는 거다. 그래서 그냥 글을 쓰기로 했다. 


언젠가는 내 이름으로 드라마를 쓰고 싶다. 

그때는 “작가님”이라고 부르면 당당하게 “네! 작가입니다”라고 대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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