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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몽 Oct 17. 2023

보조출연자는 아침 7시에 공원에서 대기한다

직업체험: 드라마 보조출연자

어느 배우가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대배우'라고 소개했다. 대배우 하면 우리가 흔히 아는 스타나 유명한 배우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웃프게도 '대배우'에는 '대(기) 배우'라는 뜻으로 조연을 맡아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침부터 차 안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했고, 낮씬인데 앞에 촬영이 길어지면서 밤이 되는 황당한 일들도 겪게 되었다. 결국 그 씬은 다음날로 넘어가면서 오늘의 대기는 내일의 대기로 미뤄졌다. 그 시간을 견뎌 자신의 시간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 작가를 꿈꾸던 글벗을 따라 드라마 현장에 갈 기회가 생겼다. 바로 보조출연자 아르바이트였다. 지인 찬스도 별다른 빽도 없는데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경험하기는 쉽지 않다. 일반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호기심으로 문을 두드렸다.    

  

보조출연자들을 관리하는 매니지먼트 기획사를 방문했다. 간단한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면서 입회비 3만 원을 지불했다. 입회비를 내는 게 이상했다. 먼저 돈을 입금하고 연락이 안 되는 사기를 당해본 기억이 있어서 ‘나 호구되는 건가’ 싶었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저걸 돌려받지는 못했다. 입회비는 출연료가 방송국이나 제작사에서 바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먼저 돈을 줘야 하는 제작사에서 돈을 주기 위해 마련한 이상한 시스템이었다. 매니지먼트에 등록을 하고, 그 당시 새롭게 시작하는 드라마 '매리는 외박중'에 투입되었다.


KBS '매리는 외박중'

2010년 방영한 KBS2 드라마 <매리는 외박중>은 만화 <풀하우스>로 유명한 원수연 작가의 원작 <매리는 외박중>을 드라마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출연자는 문근영과 장근석 주연으로 나왔고, 우리는 1회 촬영에서 보조출연자로 출연했다.      


작고 엄청 말랐던 문근영과 화면보다 키가 커서 놀랐던 장근석의 모습이 기억난다. 화면에서 얼굴이 크게 나온다며 고민하는 여배우들의 고민이 이해가 되었다. 화면의 왜곡은 이렇게 무섭다.      


보조출연자로 출연하기 위해 집결했던 장소는 홍대였다. 아침 7시에 홍대에 있는 어느 공원에서 집결했고, 보조출연자를 관리하는 보조출연자 섭외원이 이름을 부르며 출석 체크를 한 후에 기다림은 시작되었다.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오라는 말을 들어서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손에는 짐가방들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내 손에도 들렸다.      


우리는 섭외원의 지시에 따라 촬영 장소에 이동하거나 현장에 투입되었다. 콘서트장, 거리, 창고 등 필요한 곳에 적적한 포지션에 사람들이 배치되었다. 그래서 이건 드라마 현장 경험보다 배우의 삶을 체험하는 느낌을 더 받았다.      


건물 설정인데 창고로 들어가거나, 클럽 장면인데 공연장에서 음악이 없는데 음악이 나오는 것처럼 춤을 추었다. 공연하는 사람을 응원하는 장면에서 음악이 흐르지 않는데 밴드가 기타를 치는 가짜연주를 했다. 완전 라이브는 없었다. 


촬영장에서 배우를 꿈꾸는 보조출연자를 만났다. 자신을 보조출연자 일을 계속해 왔다며 소개했다. 그 당시 우리가 맡았던 역할은 거리에서 걸어가는 연인 1, 2 정도였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연인처럼 걸어가라니. 살면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모르는 사람과 말하면서 친한 척 웃으면서 얘기를 하는 일은 I형에게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일상에서는 절대 해볼 수 없는 경험이었다. 연인처럼 걸으며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갔던 것 같다. 감독의 컷 사인이 날 때까지. 걸었던 길을 다시 돌아서 걷기를 반복했다. 주어진 대사는 없다.      




보조출연자는 드라마, 영화와 같은 영상물로 제작되는 작품에 배우이지만 대사가 없으며 엑스트라를 일컫는 말이다. 전문적인 배우와는 달리 걸어가기만 하거나, 달려가거나, 죽거나, 함성을 지르거나 가만히 서 있는 등에 단순한 연기를 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극의 주변 배경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쓰이며, 배경 같은 역할을 한다. 예전에는 보조출연자로 활동하다 배우가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데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요즘은 배우로 데뷔하기 위해서는 기획사에 오디션을 보거나 캐스팅이 되어 연습생 생활을 하거나 극단에 들어간다. 예전에는 방송사마다 공채라는 개념이 있어서 매해 뽑았지만, 현재는 기획사의 힘이 커지면서 시스템이 달라졌다. 아이돌 하다가 나이가 들면 배우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아이돌이 연기하는 것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많았다. 나 역시 그런 부류에 속했지만, 시대는 변했고 아이돌이면 어떠냐 캐릭터 소화만 잘하면 오히려 좋다. 팬덤이라는 문화가 생기면서 스타성으로 오는 화제성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연기를 잘하는 것이 먼저인지 스타성을 가진 게 먼저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스타성과 인기로 인해 제작비가 달라지고, 투자가 달라지니 캐스팅을 할 때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처음부터 팬을 보유하고 안전하게 시작할 것인지 아니면 모험을 할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아침에 시작했던 일은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거의 12시간 이상을 대기하며 늦은 시간까지 촬영하고 나서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이후 통장에 입금된 돈은 7만 원정도였다. 거기서 입회비로 낸 3만 원을 빼고, 점심과 저녁 밥값, 가을이라 밖이 쌀쌀했으니 편의점에서 따뜻한 음료값을 빼면 이래저래 3만 원은 남았던가.

     

하루 종일 갈 곳도 없이 거리에서 오들오들 떨며 기다려 벌었던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떢볶이나 고기 사 먹으면서 세상에 쉬운 일 없다며 열심히 살자고 했겠지. 

    



이후로 한 번도 보조출연자를 해본 적은 없다. 보조출연자도 소모적인 직업이다. 꼭 필요하지만, 누구든 상관없이 대체가 가능하다. 보조출연자는 개인이 아닌 '뭉텅이'다. 출연한 작품 크레디트에도 이름이 아닌 회사 이름이나 대표, 관리자의 이름만 올라갈 뿐이다.      


보조출연자는 일용직 근로자보다 돈을 적게 번다. 식사, 이동, 휴식, 숙박 등에 비용이 자비부담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급여만 놓고 보면 보조출연자가 일용직 근로자보다 많이 버는 것 같지만, 하루 평균 노동 시간이 일용직 근로자에 비해 보조출연자 쪽이 더 길다.    

   

현재 최저 임금 상승과 노동자에 대한 인식 전환으로 2019년 기준 기본 일급이 66,800원(8시간+휴게 1시간)이며 9시간 초과 시, 시간당 1.5배 12,525원, 밤 10시~새벽 6시까지는 야간 수당이라 2배로 계산된다. 촬영 종료 시간에 따라 매끼마다 식비 6,500원, 새벽 집합과 새벽 하산일 경우 야간 교통비 8.500원을 지급해 준다.


예전보다 보조출연자에 대한 처우가 좋아졌다. 그렇지만 누구도 끝도 없는 '기다림'을 이겨낼 재간은 없다. 무슨 일을 하는지 조차 모르면서 대기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배우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보조출연자들은 자신의 쓰임을 위해 하염없이 기다린다. 


'기다림'이라는 것은 배우나 보조출연자에 국한된 일은 아니다. 모두 각자의 기다림을 안고 대기를 하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버티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기다림의 끝을 볼 수 있으며 인생이라는 완결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내게 보조출연자는 하룻밤의 꿈, 해프닝 같은 가벼운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루고 싶은 꿈, 가지고 싶은 직업이었다. 이제는 배우지망생 보조출연자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투잡을 겸한 아르바이트나 경험 삼아 일하는 경우가 많다.


문득 촬영장에서 만났던 배우를 꿈꾸던 사람은 바라던 배우가 되었을지. 아니면 계속 보조출연자로 일하며 불러주길 대기하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날이다. 나 역시 오늘도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나를 불러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대기 중이다. "훠이 훠이~~ 저 여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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