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트다움 Dec 05. 2023

63빌딩-ish 계단 오르기

고행이 쉼이 되는 그런 날

가만히 있기. 멍 때리기. 오래 앉아있기. 이런 거 잘하는 게 자랑은 아니지만 난 참 틈틈이 쭉 한 가지를 한 자리에서 계속하는 걸 잘한다. 활동량이 많지 않다는 얘기를 참 입 아프게 길게도 한다. 운동을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2년 넘게 필라테스도 해봤고, 매일매일 뒷산인 관악산 등반도 해봤다. 운동을 하긴 했지만 즐기며 한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시작이 지속되지 못하고 지금은 멈춰있나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다. 나는 뭐든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잘하는 인간이니까. 항상 이게 문제다. 할 때는 좋지만 어느 것 하나에도 미쳐서 하지 않는 것. 그런데 운동이라는 것은 사실 단지 나의 취향을 만들기 위해 하는 것이라기보다 살기 위해서 하는, 냉정하게 생각하면 생존과 연결되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에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무조건 해야 하는 그런 것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리 접근해서는 내 굼뜬 몸뚱이를 움직이게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생각해 보면 계단 앞으로 나를 세우기 위한 조건이 몇 가지 있는 듯하다. 하나는 답답함이 차올라 뭐라도 하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 같을 때 또 하나는 그토록 숨이 막히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숨구멍을 찾아 멀리 이동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을 때. 아직 출근을 하던 만삭 임산부 시절이 꼭 그랬다. '천천히 오르면 무리되지 않겠지' 싶어 손잡이를 잡고 10층까지 2-3번씩 올랐었다.


그 후 최근에는 한 동안 매일 20층 아파트 계단을 3번, 어느 날은 4번씩 반복하여 오르던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컴퓨터를 벗어나지 못했던 날. 밥을 먹고 나서 배가 부른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던 날.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잠시 잠깐 여백이 필요하던 날. 무작정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서 1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60층이 넘는 계단을 오르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다리는 그냥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머릿속으로는 딴생각을 하는 것이다. 20층을 한 번 오를 때까지는 땀조차 나지 않는다. 두 번째 20층을 만나면 그때부터 조금씩 땀이 나고 있구나 인지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부터가 땀구멍이 열려 줄줄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땀이 흐르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갈수록 조금씩 더 많은 오르게 되고 그러면서 체력도 조금씩 좋아짐이 느껴진다.



계단 오르기가 쉼이 되는 포인트는 '딴생각'에 있다.


그 시간만큼은 꼭 일과 관련된 생각이 아니어도 괜찮다. 난 운동 중이니까. 그렇다고 일 생각이 아예 안나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일과 관련된 주제로 생각이 깊이 더 깊이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 또한 일의 연장선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너무 깊이 파고 들어가서 엘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탐험하는 듯한 엉뚱한 맥락인 날이 더 많으니까. 때로는 근거 있는 상상을 하고 때로는 삶에서 내가 감당하는 역할들을 떠올리며 흐뭇해하기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고, 계단을 걷고 있는 시간들은 머릿속이 그야말로 난리뽕짝으로 자유롭다. 내 자유로운 상상으로 아파트의 계단 통로가 형형색색으로 물들어버린 듯한 그림이 머릿속을 맴돌 만큼.


계단 오르기는 정적인 나에게 딱 맞는 쉼의 방법이다.


날씨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사람을 만나는 일도 거의 없고, 그래서 방해받을 일도 드물다. 60층 이상을 올라도 시간이 30분? 4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서 운동량 대비 시간 소비에 있어서 효율적이다. 계단을 오르기 위해 멀리로 갈 필요도 없고 가족들이 집에 모두 있는 저녁시간에도 그 정도 시간은 잠시 나갔다 와도 부담이 덜하다. 운동이라는 핑계로 이렇게도 자유로운 쉼이 가능한 것이다. 내가 귀찮아하지만 않는다면.


"관절 조심해. 몸을 아껴야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의 변명은 "나 한 계단 한 계단 정말 천천히 올라가요"였다. 아닌게 아니라 혹여나 무리가 될까 봐 운동 효과고 자시고 발바닥 전체를 사용해서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밟아 올라간다. 체중을 무릎에 싣는다는 느낌이 아니라 허벅지에 힘이 가장 많이 들어가서 허벅지가 딴딴해지는 느낌으로 오른다. 난 엄청난 쫄보거든.


그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까지 매일 오르던 계단도 한번 오르지 않기 시작하니 다시 멈추어버렸었다. 그리고 이제는 매일 계단을 오를 엄두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때로는 무념무상 또 때로는 한 바탕 딴생각을 하던 그 시간이 떠오르고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올라보자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고행에 가까운 계단 오르기가 정말 쉼이 될 수 있을까?


땀이 펑펑 터져 나오면 속에 있는 답답함이 땀과 함께 펑펑 터져 나와 독소와 함께 배출되어 버리는 느낌이다. 땀을 흘리고 나면 체중도 조금 줄어있으니 기분마저 좋아진다. 물론 가족과 함께 즐거운 간식 시간을 즐기고 나면 금세 도루묵이지만 말이다. 느린 정속도로 몸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그 지루한 행위가 딴생각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 시간만큼은, 내 머릿속은 '운동'이라는 명분이 있는 자유다.


아하. 쉼은 머릿속이 자유로워야 하는구나.   


내가 어떤 행위를 쉼으로 느끼는지와 세상이 그 행위를 쉼으로 간주하는지는 다른 이야기일 수 있다. 나는 쉼을 찾는 여정에 있어 세상의 관점보다 나의 느낌을 존중할 것이고 그렇게 디자인한 나의 쉼의 방식 안에서 난 자유를 맛보는 중이다.  


난 어떤 활동을 할 때 자유함을 느끼는가?

이전 02화 Kuhlau Op.55 No.3 1악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