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소설 <일곱번째는 내가 아니다>와 영화 <줄스>에 부쳐
먼저 영화 이야기.
마크 터틀타웁의 2023년작 <줄스>의 주인공 밀튼의 일상은 크게 세 가지 일의 반복이다. 마을 의회에 참석하여 의견 발제하기, 걱정뿐인 딸에게 걱정말라고 타이르기, 티브이 보다가 잠들기. 그러던 밀튼의 일상에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다. 뒷마당 화단으로 UFO가 추락하고 외계생명체가 기어나온 것. 밀튼은 곧장 신고를 하지만 수화기 넘어로 돌아온 답변은 장난전화하면 처벌 받는다는 말뿐인데... 밀튼은 결국 외계인을 집 안으로 들이고, 조용히 사과만 먹는 작은 외계인과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다음은 소설 이야기.
폴 클리브의 2006년 소설 <일곱 번째는 내가 아니다(한국어판은 2025년 서삼독에서 발간)>은 경찰서에서 청소 일을 하는 남자 조의 이야기를 그린다. 수줍고 무해한 남자의 전형 조는 사실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다. 그리고 그는 세간에서 말하는 '일곱 번의 살인'에는 큰 오해가 있음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그중 여섯 건만 자신의 소행이고, 나머지 하나는 모방범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는 모방범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 나머지 여섯 건의 살인까지 모두 덮어씌울 계획을 세운다.
두 작품은 장르가 완전히 다르지만 어딘가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그 공통점에 대해 말하는 게 이번달 살롱의 숙제. 그런데 살롱 멤버인 멜빈이 먼저 기가막힌 글을 제출해 버린 탓에 고민은 깊어지는데... 가만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얘기가 하나 있다. 바로 '집'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다.
멜빈에 따르면 두 작품속 주인공의 공통분모는 고립이다. 밀튼은 아무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 상황에 고립되어 있다. 의회는 그의 의견을 번번히 묵살하고 아빠의 건강이 걱정이라는 딸은 아빠의 심경에는 안중도 없이 요양원행을 강요한다. 그런 그의 갈증을 채워주는 것은 다름 아닌 꼬마 외계인 줄스다. 줄스의 기특한 점 하나는 그가 사과만 먹는다는(식비가 별로 들지 않는다는) 점인데, 더 황송한 건 그가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 한마디 없이 오로지 들어주기만 하는 이 고마운 존재가 고립된 노인 밀튼의 마음을 조금씩 치유한다.
한편 조의 경우 직장도 있고 젊음도 있는데 여전히 고립되어 있다. 그 고립은 '느린 조'를 연기하고 있는 본인의 책임으로 보이긴 하지만, 문제는 그가 왜 '느린 조'를 연기하느냐에 있다. 조는 죽은 아빠에 대한 트라우마에 더불어, 살아 있는 엄마가 주는 더 큰 라이브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애초에 블랙코미디 범죄 소설이므로 동정이 개입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되는 중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조가 어째서 사이코 킬러가 된 것인지 짐작해보게 된다.
내러티브의 추가적인 공통점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두 작품의 만듦새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다. 먼저 <줄스>는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백 점짜리 영화인데, 단지 보는 사람을 치유시키는 푸근한 서사 때문만은 아니다. 솜씨 좋계 설계된 밸런스와 템포가 몰입을 극대화하고 있다. 수습 불가능할 정도의 큰 이야기를 늘어놓지도 않으면서, 엉뚱함과 나른함이 비율 좋게 배합되어, 따스한 기운이 결말까지 보존된다. 어린 꼬마를 연상시키는 줄스의 체격, 그에게 옷을 입히는 노인들의 제스쳐, 고양이 그림 같은 귀여운 미술의 터치는 덤이다.
반면 <일곱번째는 내가 아니다>의 경우 충격적인 도입부가 독자의 멱살을 쥐며 시작하지만 뒤로 갈수록 어수선함이 있다. 충분히 사전설명되지 않은 인물이 뒤에 가서 부각된다든지, 주인공이 인물을 혼동하는 탓에 독자의 머릿속까지 혼란스럽다든지 하는 불편한 점이 소설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럼에도 전반부의 긴장과 특유의 블랙코미디스러운 터치는 경험해볼만하다. 뉴질랜드에서는 이름깨나 날리는 폴 클리브가 한국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작품을 시작으로 폴 클리브 유니버스를 좀 더 만나게 되려나, 기대해본다. 썩 만족스럽지는 못했던 결말에 불구하고, 한국어판이 나온다면 그의 작품들을 좀 더 접해 볼 생각이다.
다시 내러티브로 돌아간다. 두 작품은 모두 고립된 주인공의 기이한 행동을 따라가면서, '집'이라는 키워드를 부각시킨다. 먼저 밀튼의 경우는 이렇다.
"우리 마을의 슬로건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어 그레이트 플레이스 투 콜 홈'이라는 말은 혼동의 여지가 있거덩요..." 의회에 참석할 때마다 밀튼이 하는 말이다. 'A great place to call home'이라는 문장이, '집이라 부를 만큼 좋은 동네'를 말하는 건지, '집으로 전화를 걸기에 좋은 장소'인지 헷갈린다는 것. 영화는 이 장면을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한다. 즉 이야기의 에센스가 전부 여기 녹여져 있다는 것.
밀튼은 자신의 집에 살고 있지만 집이 제 기능을 못한다.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는 것이다. 아내와는 사별했고 아들과는 연락이 끊겨버렸다. 자신을 살갑게 챙기려는 딸이 있긴 한데, 딸의 접근은 오히려 밀튼을 불편하게 한다. 그 이유가 딸의 어느 방문 때에 잘 나타난다. 딸은 아빠 집에 찾아와 현관문 앞에 서서 할 말만 하고 간다. 그 탓에 집 안에 외계인이 앉아 있는 걸 전혀 모른다. 밀튼의 고립감은 이와 같이 밀튼의 마음 속으로 걸어들어오려는 타인이 없음에 기인한다. 그래서 밀튼을 둘러싼 대화는 전부 전화로만 이루어진다. 이래서야 원, 여기가 집이라 불러도 좋을 장소인지, 어딘가로 전화를 하기 좋은 장소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런데 줄스가 등장하면서 그의 집은 비로소 제 기능을 시작한다. 찾아오는 사람이 있고, 전화를 걸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하다. 그리고 함께 할 일도 생긴다. 이를테면 고양이 시체 찾기 같이, 중요하고 신나는 일들이.
<일곱번째는 내가 아니다>의 경우 조가 머물고 방문하는 공간 묘사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도입부에서 그가 방문하는 집이나 그가 살고 있는집, 그리고 뻔질나게 찾아가는 사건현장, 호텔, 경찰서 같은 곳이다. 그 많은 공간을 쏘다니고 있음에도 조는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는데, 자신과 결이 맞는 공간을 못찾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건 조의 탓일 것이다. 그는 머무는 모든 공간에서 거짓말을 한다. 엄마한테도, 형사한테도, 동료한테도 그는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 밝힐 의지도 방법도 모른다. 조의 갈증은 본연의 모습을 노출할 집이 없다는데 있다. 마침내 그의 정체를 알아본 멜리사가 해방구 역할을 하는가 싶은데... 해피엔딩으로 가기엔 그에게 죄가 너무 많다.
*
밀튼이 의회에 찾아가 말하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슬로건을 바꾸자는 것, 또 하나는 횡단보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슬로건 얘기는 집이라는 상징을 다루면서 또 다른 복선의 상징인데, 그토록 명명에 집착하던 밀튼이 정작 외계인 이름짓기에는 관심이 없다는 후반부의 장면과 연결성이 있다. 그는 왜 이름짓기를 포기한 걸까? 의회가 의회의 이름으로 귀를 닫고 있어서, 딸이 딸의 이름으로 불효를 자행해서일 것이다. 그는 마침내 자신에게 온기가 되어준 이 기묘한 존재에게 이름 붙이는 일이 불필요하다고 본다. 중요한 건 뭐라고 부르냐가 아니라, 부를 필요 없이 옆에 있는 것이라는 걸 그의 바뀐 태도가 역설한다.
횡단보도의 이야기는 안전함의 상징이다. 그는 자신이 좀 더 안전해야 함을 강조하고, 나아가 마을이 좀 더 안전해져야 함을 어필한다. 문제는 누구도 그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지만.
그리하여 줄스가 외계로의 여행에 자신들을 초대할 적에, 밀튼은 흔들린다. 집 같지도 않은 이 곳, 안전하지도 않은 이곳에서 그는 벗어날 궁리를 한다.
2025. 1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