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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로칼랭 Jun 10. 2020

불륜을 시작한 친구의 전화

#권태의 두려움

        

불륜은 흥행의 치트키일까.

영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소설에서도 불륜은 언제나 있다.


불륜을 저지르는 두 사람이 주인공이면 일단 슬픈 이야기다. 장르로 치면 로맨스다.

두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결국 이별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기에 비극은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삶에서 상처 받은 두 사람이 만나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고, 관계를 통해 위로를 얻는다.

하지만 그 대가는 크고 반드시 치러야 한다.   

  

반면, 불륜을 저지르는 두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면 이건 얘기가 다르다.

배우자에게 상처를 남긴 불륜 치정극으로 폭주하다가 폭행이나 범죄로 이어지고, 결국 파국이 된다.

장르를 따지자면 그렇지, 스릴러 범죄극이 될 게 뻔하다.     


해피 엔드, 1999 정지우 감독



영화 ‘해피엔드(1999년)’에는 불륜을 저지르는 주인공도 있고 배우자에게 배신을 당하는 주인공도 있다.  

    

전도연이 연기한 최보라는 아이를 낳고 생계와 육아를 모두 책임지는 고된 삶을 살고 있다.

은행에 다니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남자 서민기(최민식 분)와 결혼했지만, 출산 뒤에 실직자가 됐다.

실직한 남편이 육아를 담당하고 요리와 청소, 분리수거까지 척척 하며 ‘실직 상태’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롭기만 하다.


그 권태한 날에 과거 애인이었던 김일범(주진모 분)을 떠올리고 두 사람은 불륜의 관계를 맺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불륜’은 제어장치가 고장 나 폭주하는 기차처럼, 위험할 뿐 아니라 멈출 수도 없다.              


(스포 주의-댓글 요구 반영)

사건은 여기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남편은 소설의 한 장면처럼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뒤, 불륜남을 덫을 빠뜨리고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던 불륜의 여주인공이나, 아내이며 딸의 어미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비극의 남주인공 누구에게도 ‘해피’ 하지 않는 결말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위태로운 길을 선택했을까.     




밤 12시 무렵이었다. 잠 들 시간은 아니었지만 잠 잘 준비를 끝낸 나는 널찍한 침대에 누워 이불에 몸을 비비고 있었다.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궁금하지 않은 뉴스들을 보면서 내가 세상과 분리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잤어?”     


 바짝 긴장한 친구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안 잤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저기 내가 할 말이 있어서…….”     


 말투가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 곁에 있는 듯. 아니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에게 쇼를 시작하는 사람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뭐야. 누구랑 같이 있어?”

 “.....”

 “누구랑 같이 있는데?”

 “.....”

 “남편이랑 싸웠어?”     


숨소리가 다르게 느껴졌다. 친구가 밤 12시에 전화해서는 입을 다물었다니…. 내가 알아야 한다.


내가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고, 입을 열게 할 한마디를 해야 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려는 것은 아닐지, 머리가 팽팽 돌았다.     


 “나 들을 준비 다 됐어. 다 괜찮으니까 말해. 괜찮아. 말해봐.”     


그리고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친구가 입을 뗐다.     


 “고해성사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     


숨소리를 죽여가며 수화기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방금까지 평화롭던 나의 세계를 사라졌고, 이내 어두운 밤 어딘가에 아이처럼 주저앉아 있을 친구의 세계가 열렸다.


 “남편이 아닌 남자를 만났습니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남편과의 불화가 길게 이어졌고, 외롭게 혼자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으니까.

돈을 벌겠다고 들어간 마트에서 다정하게 도와주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난 이미 알았다.

친구는 그 남자에게 인생을 기대고 싶었다는 걸. 슬픔을 위로받고 싶었다는 걸.


친구의 고해성사를 뚝 잘라내며 다시 물었다.     


 “알아. 지금 같이 있어?”

 “응.”

 “근데 왜 지금 전화를 해. 남자 보내고 전화해. 지금 어딘데?”

 “차 안이야.”

 “빨리 들어가. 애들 기다리잖아. 어서 집에 들어가서 전화해.”     


나는 다그쳤지만, 친구는 울기 시작했다. 숨소리만 들려왔지만 난 알 수 있었다.


‘헤어지려고 했어. 오늘 헤어지려고 했어. 너한테도 얘기하고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 아이들에게도 미안해. 그런데 잘 안돼. 어떻게 해. 나를 도와줘.라는 말.

하지 않을 그 말들이 들리는 듯했다.     


친구는 함께 있는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에게 전화했지만, 그 말은 내가 아닌 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힘이 들고, 남편이 아닌 남자를 만나는 것이 상처가 되고,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 제발 이 관계를 끝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한참 울고 친구는 전화를 끊었고, 나는 ‘기다릴게. 다시 전화해.’라고 덧붙였다.      






며칠이 지났다. 장거리 운전을 해서 친구를 만나러 갔다.


경기도에서 서울을 지나 다시 경기도로, 지도를 대각선으로 접은 것처럼 멀리 떨어져 자주 보지 못한 친구를 오랜만에 봤다. 우리는 함께 나이 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내가 먼저 말했다.     


 “뭐야. 왜 이렇게 좋아 보여?”     


놀리듯 물었더니 피식 웃는다.

좋을 일이 있을 것도 없는 친구의 삶을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남편은 요즘도 집에 안 와?”     


 ‘남편이 아닌 남자’의 이야기는 뒤로 미뤘다.

내가 얼굴도 알고 밥도 같이 먹었던, 결혼식장에도 쫓아가 축복을 빌었던 남편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출장이 잦은 직업을 핑계로 떨어져 살다 보니 아이들과도 이미 서먹해진 '한 집안의 가장'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집에 자주 올 턱이 없었다. 게다가 술주정과 폭언 폭력을 반복해 보여주던 가장이었으니, 아내도 자식들도 마음이 떠나버린 지 오래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서를 진행했다.


 “그냥 그 남자 한 번 같이 만나자. 내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 그럴까? 아니다. 아니야.”     


친구는 비밀 속에 숨은 얼굴을 내게 결코, 보여주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스무 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친구는 긴 갈색 머리는 길게 늘어뜨리고 덧니를 드러내고 웃었었다.

마음이 약해 싫은 소리는 하지 못하는 착한 소녀.

어디서 왔을지 모를 인생의 죄책감을 어깨에 메고 매번 헛웃음으로 단단하게 자리를 지켜왔던 친구였다.  

    

거친 세월에 무뎌졌고 단단하고 억세 졌던 얼굴이 다시 소녀처럼 되어 있었다.

틀어 올리고 살던 머리칼을 다시 길게 늘어뜨리고 앉아 소녀처럼 웃는다.      


 ‘아이 씨 뭐가 이렇게 아이러니야. 뭐야, 사랑에라도 빠진 거야?’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고해성사를 하던 친구의 진심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기로 했다.      

 “왜 안 보여주려는데. 내가 그 남자 만나는 게 싫어?”

 “응.”

 “그럼……. 헤어질 거야?”

 “그래야지.”     


 차마 친구 얼굴을 보지 못해서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잘 생각했다. 헤어져. 당장 헤어져. 알았지?”     


 대답 없는 친구한테 한 마디 덧붙였다.


 “남편 하고도 헤어져. 당장 헤어져. 그냥 다 헤어져. 알았지?”     


친구는 피식 웃었다가, 깔깔 웃는다. ‘그럴까?’ 하고는 다시 배시시.      








아내의 외도를 눈치챈 사무엘은 불륜남을 직접 만나러 가기 전 권총 한 자루를 샀다.

그저 권총 한 자루를 산 것뿐인데. 사무엘은 몇 년간 잊고 살았던 삶의 환희를 경험한다.

소설 ‘케네디와 나(장 폴 뒤부아 지음)’의 이야기다.



<케네디와 나> -장 폴 뒤부아



작가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인 마흔다섯 살 '사무엘 폴라리스'에게 어느 날 권태가 찾아왔다.

애정을 가지고 지키려고 했던 모든 일에 회의가 느껴졌고 무력감이라는 늪에 져 버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서랍에 들어 있는 '권총 한 자루'가 사무엘을 조금씩 흔들게 된다.

권총이 준 용기였을까? 아내의 불륜남을 직접 찾아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가 하면, 자신을 무시하던 치과 의사를 물어뜯기도 한다.

게다가 몇 년간 거리를 두고 살았던 아내와도 다시 잠자리할 수 있었다.      


권태는 우리를 무너뜨리는 무서운 질병이다.

관계에서의 권태만이 아니다. 반복되던 일상, 매일 습관처럼 가는 회사에서도 권태는 찾아온다.

문제는 이 권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고, 빠져나오려고 잘못된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무엘이 가진 권총 한 자루는 우리에게 없다.

하지만 무엇이라도 꺼내 들어야 한다.


절망이 잠깐씩 분노가 되어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아도 그건 방법이 아니다.

힘없이 쓰러진 나를 일으킬 뭔가를 찾아내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늪에 빠질 수도 있다.    

      




나는 나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말하자면 아내와 세 아이와는 전혀 상관없이 혼자 사는 셈이다.

우리는 한 집에 살지만, 다 같이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이른바 가족이라는 일체감을 잃어버린 지 아주 오래되었다.

세월이 갈수록 우리의 감정은 파편화되어 조각조각 흩어졌다.  

그렇다고 우리 중 그 누구도 각자 다른 세계를 찾아 떠나 살만큼 똑똑하거나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닌 채 서로 멀어졌다.

오늘도 한 집에 모여 보통 가족의 관습과 형태를 그대로 흉내 내며 정해진 시간에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러나 나머지 시간에는 각자 무엇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게 유일한 자존심이라도 되는 사람들처럼 서로 모른 체하며 지낸다.      

 

 (중략)


나는 옷을 다 벗은 채 욕실 거울 앞에 섰다.

김이 잔뜩 서려 불투명해진 거울을 통해 나의 모습이 조금씩 보였다.

내 섹스의 윤곽도 보였다.

마치 죽은 새 같다.     


- 장 폴 뒤부아 <케네디와 나> 중에서            



   




그날 이후 친구가 그 남자를 계속 만나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냥, 내가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내가 다른 일로 안부를 물을 때마다 나와의 약속을 기억할 테니까.      

위로는 이렇게도 다가간다.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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