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로칼랭 Jun 27. 2020

술 취한 엄마의 '잠 고문'


열일곱이었다. 그때였다. 우리 집은 가난해졌다.


처음엔 집을 팔았고, 다음엔 전세로. 다시 월세로 옮겼지만. 그 삶도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옥탑방 단칸방에 다섯 식구가 함께 잠을 자야 했다.


큰돈을 벌기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아버지의 선택이 완전히 빗나간 그때 - 문을 열면 싱크대가 보이고, 싱크대 옆엔 나를 위한 책상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밤이면 나는 그곳에서 공부를 했고 방 안엔 다른 가족들이 함께 잠들었다.


막연하게 느꼈던 가난이 현실로 다가왔으니 '우리가 완전히 파산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도 있었지만,  철없던 열일곱의 나는 희망이라는 걸 품고 살았다.  어떤 장사도 할 돈이 없다며 엄마가 포장마차를 시작했을 때, 나는 지나치게 최선을 다하는 엄마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내가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고 있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냥 더 심플하게 표현하자면 현실이 되어버린 '진짜 현실'이 부끄러웠다.

 

낮에는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비닐봉지에 뭔가를 담아왔다가, 리어카를 끌고 밤거리를 나가던 엄마는 그때부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나만큼이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포장마차를 부끄러워하는 그 남자 - 자신의 남편을 향한 분노였을 것이다.


밤 장사를 하던 엄마가 가족들이 모두 잠든 뒤에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엄마는 자고 있던 나와 언니를 깨웠다.  엄마 앞에는 김치와 소주가 있었고, 엄마는 울고 있었다.


 "내가, 내가... 너무 억울해서...."


술 취한 엄마는 감정의 늪에 빠져 울었다. 

그런 엄마와 대화를 나누기엔 너무 미성숙한 나이를 살고 있던 언니와 나는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날부터 언니와 나에겐 간헐적인 패턴을 그리며 잠 못 자는 밤이 이어졌는데, 주된 레퍼토리는 눈물 섞인 설움에 관한 것으로 간단히 말하면 주정이었다.


남자를 믿은 죄로 재산을 탕진한 현실이 한심했을 것이고, 매일 포장마차에서 술을 팔아야 했던 신세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처량했을 것이다. 그런 심정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남자의 자식으로 태어난 우리는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상처 받은 기억들을 두서없이 꺼내놓던 레퍼토리가 이어지다가 분노가 견딜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면 우리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화를 내기도 했었다.


서러움과 슬픔,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엄마의 감정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는데, 그 감정을 '공감'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언니는 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한 걸음 물러선 사람처럼 눈을 살짝 감고 졸기도 했지만, 그 소용돌이에 휩쓸릴 수밖에 없던 나는 매일 밤 함께 울었다.


 "울지 마세요, 엄마. 울지 마세요."


이런 말 외에는 어떤 위로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나이였기에, 엄마가 잠들 때까지 그 대화는 이어져야 했다. 새벽 두 시를 지나 새벽 세시로. 다시 새벽 네시로 이어지는 일방적인 대화는 참다못해 소리 지르는 아버지의 중재가 터져 나올 때에야 비로소 중단되었다.  


엄마가 늘 불쌍했지만. 또 싫었다.

자식 앞에서 보여준 지나치게 많은 눈물이 '내가 이 고통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사는 건 바로 너희들 때문이야'라는  원망의 목소리로 들려서였다.  그렇다고 '내 존재가 짐이라는 거냐, 그래서 내가 없었으면 좋겠냐'라고 물어볼 용기도 없었으니, 마음 약한 나는 두려운 일상을 - 어쩌면 약간 술 취한 사람처럼 - 살아내야 했다.






세월이 지나고 가끔 언니와 나는 그날을 이야기한다.


 "언니 그때, 그 잠 고문 기억해?"

 "그럼.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어."

 "언니 내가 자다가 자주 깨고, 예민하게 자는 게 그때 생긴 병인지도 몰라."

 "그러게 그럴 수도 있겠다."


서로를, 각자를,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다가 문득 이런 질문을 해보기도 했다.


 "그때 엄마가 몇 살이었지?"

 

예상 못한 나의 질문에 언니는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듯 말했다.


 "마흔다섯인가, 여섯인가? 아니 일곱?"


엄마 나이를 가늠하다가 우린 똑같이 탄식했다.


 "아이고, 힘들었겠다."


남 이야기를 하듯이.   


옛날이야기처럼, 언니와 웃으며 수다 재료로 삼을 만큼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엄마 앞에선 말하기가 두렵다. 우리 모두에게 결코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었으므로. 

게다가 이 시절 나를 기억하다가 문득 엄마에게 화를 낼지도 몰라서였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2019.  고레에다 히로카즈


 


얼마 전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딸과 엄마는 과연 어떤 관계에 있는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장하면서 엄마의 부재를 경험했던 딸 뤼미르(줄리엣 비노쉬)는 여배우로 사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말하는 엄마 파비안느(까뜨린느 드뇌부)와 불안한 재회를 하게 된다.


인생을 정리하는 회고록 발간을 앞둔 엄마를 축하하기 위한 만남이었지만, 의식의 흐름은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엄마의 과거의 너무나 아름답게 미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딸의 가슴에 묻어둔 분노를 흔들어 깨웠다. 


세상의 많은 딸은 그렇다.

엄마의 삶을 동정하다가, 비난하다가, 이해하다가, 또 거부한다.


딸 뤼미르는 엄마 파비안느를 본격적으로 비난하지만 이상한 것은 엄마의 태도다. 

변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 

배우로서 성공한 자신을 오히려 자랑하고, 딸의 비난 속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에겐 모든 게 대사야. 넌 배우로 살아보지 않아서 몰라."


연극을 하듯 살아가는 엄마. 그리고 그 엄마의 곁에서 '분노'라는 감정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딸.

둘은 마치 유령처럼,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사라'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깊은 갈등을 꺼내놓는다.


영화는 약속된 종료 시간을 몇 분 앞두고 

갈등이 생각보다 쉽게, 그것도 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리의 연주자가 선물하는 음악 앞에서 당장에라도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출 수 있는 것처럼.

예고 없이 어느 늦은 밤, 자서전 속 '진실'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으면서 -


 "마법이라도 부린 거예요?"

 "왜?"

 "왜냐하면... 이러다간 금방 엄마를 용서할 것 같거든요."

 "너하고 나는 줄곧 잘 지내 왔잖니. 서로 아는데, 마법이 왜 필요해."


 -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중에서 

   





문득 영화 배우도 아니고, 유명 인사도 아닌 엄마의 인생 회고록을 대필해 보고 싶어진다.

포장마차를 이끌고 늦은 밤 옥탑방으로 숨어들었던 엄마의 밤을 이제라도 상상해본다면. 

한번도 묻지 않았지만, 이런 것일까?



 술 취한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나도 취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흔들흔들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방 하나에  줄을 맞춰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팔다 남은 소주 한 병을 가져와 김치에 마셨다. 소주는 지금 이 시간 나를 위로해 줄 유일한 친구이고, 아픈 팔다리를 진정시킬 진통제니까.

 

술에 취해 나도 모르게 아이들을 깨웠다. 잠이 들면 도둑이 와도 일어나지 않을 남편은 내 참던 울음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었을까.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라는 것을 안다.

그저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또 소리내 울고 말았다.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엄마는 그날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고 우리도 침묵했지만, 마법은 필요 없다.

우리는 줄곧 잘 지내왔고, 서로 그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