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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Jun 29. 2020

<제로 다크 써티>-자신의 모든 것을 태우다

하얗게 탄 연탄을 걷어차지 말라 그만큼 뜨거워본 적 없었다면.

스포일러가 자정 무렵의 도시 속 조명만큼

들어 있습니다.

"잠 못 드는 시간, 잠을 이룰 수 없는 시간, 너무 어둡고 고통스러운 밤이자, 고통을 감내하고 밤을 새울 것을 선택하는 시간 또는 고통스러운 하루를 다 보내고 드디어 안식처에서 잠에 드는 시간"


자정 이후의 어두운 30분 뒤, 그러니까

자정 12시 반이 이 영화의 제목의 뜻이다.

군사 용어에서 따온 것으로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을 수행한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대략 우리나라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잠자리에 드는 시간보다 이르긴 하지만,

미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에 이 시간은

"잠 못 드는 시간, 잠을 이룰 수 없는 시간,

너무 어둡고 고통스러운 밤이자,


고통을 감내하고 밤을 새울 것을 선택하는

시간 또는 고통스러운 하루를 다 보내고

드디어 안식처에서 잠에 드는 시간"이기도

하리라.


밤 10시경에 IPTV의 무료 영화 중에서

고른 이 작품은 마칠 무렵 자정 12시 반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랬기 때문이었을까? 이 제목이

말하는 시간에 영화 밖으로 나온 일상이

내게는 나름의 감각적인 답변을 던져주었다.  


"제시카 차스테인"의 불면과 불만,

지적이고 공격적이고 신경질적인

인상의 연기가 마무리되면서,

그가 2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10년의 시간과 에너지, 열정을

모두 부어, 결국에는 3천 명의

무고한 미국인을 비행기 테러로

죽인, 911 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도록 하고,

이 야간 급습 작전의 현실적인 디테일은 엄청나다


성공적인 임무 완수를 한 시점에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의

복합적인 감정을 일부나마 느끼고

마치 내 것인 것처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마지막의 연기는 말 그대로 실화와 영화를 관통하는 주인공의 축적된 심적 고뇌를 일순간에 폭발시키면서도 강인하게 절제한 명연기 중의 명연기였다.


이 영화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평론이던지 한 줄 평가던지 결국

이 마지막 그녀의 한숨 섞인

울음의 의미를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하려다가 영화에 대한

양 극단의 평가를 내리는 것을

이 글을 쓰기 전에 보았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왜 그 울음의 의미를 허탈감이나

부질없음, 허무감이나 반대로

해소감이라던가 감격의 눈물

정도로 어찌 되던 딱 부러진

해석을 하려고만 애쓰는가였다.


마치, 인생을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꿈이나 어떤 목표, 이룰 수 없어

보이는 과업 달성을 위해 달려간 뒤에

주변의 사람을 리드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고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며

붕괴하지 않기 위해 악물고 노력하다가

방전이 되고 완전히 녹초가 되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며,

그의 스타일리시한 모습은 번아웃 상태의 자신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는 와중에서 나온다.

잘 되었든 잘 되지 않았든, 그 결론에

이르러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참아온

모든 감정이 느껴져 오는 동시에,

부질없다는 허무감과, 자신에 대한

뿌듯한 감정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고양된 슬픔 또는 기쁨과

더불어 넘쳐, 흐느끼는 울음으로

터져 나온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그들은 글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리 보아도 열정으로

타올랐다가 그 열정의 대상을

쟁취하였거나 완전히 잃어버린

뒤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영화를 통해서 체험하지 못했을

뿐더러 자신의 인생에서도

체험하지 못한 것처럼 이 영화를

지금까지 평가해 온 것 같았다.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성과 목표, 돈벌이, 사랑, 명예 등을 얻기 위해 종종 자신이 가진 양심이나 인류애, 정의감을 버리고 눌러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2020년의 여름, 난 이 영화를

통해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미국의

적을 찾아 이를 죽게 만들어

복수한 철의 여인의 영웅담이

아니라, 그 과정 상에 있었던

사회적, 정치적 불합리와 싸우고,


미약한 단서조차 가능성이

있다면 이를 부여잡고

놓치지 않았던, 이 사회 속의

목표 한 가지에 매진하며

자신을 불살라버리는 인간,

한 여성이 어떤 존재일지를

제대로 그려내는 것이라고

뜨겁게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영화가 잘 만들어졌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평가해야

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탈진

상태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밀어붙여야 하는 삶의 충동과

당위, 일에 필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게끔 만드는 이 세상의

모든 것과 마주하고 있는


각 개인이 처한 자신의 현실에

대한 각성을 가져올 수 있도록

관객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도록 만든 것이

또 다른 이 영화가 주는

가치 있는 기회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새벽녘에 이르러 지친

이 첨단 고도 자본주의 사회의

복잡다단한 정치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이

꼭 승리자로 살아가는 것만으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이념을 가지고 이 사회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테러를 가한 존재를 찾아

복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이 사회의 행복을

유지시키고 향상하는 결론을

낳는 올바른 것이냐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는 부분도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 CIA가 테러에

연루된 인물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는 장면이 여러 번 되풀이

되고, 일면 그 장면들은 마치

정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을 인간 이하로 느끼게끔 고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는 정당화하는 듯하지만 옹호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고문을

테러리스트들에게 가했던

심리학 박사가 더 이상 고문을

하기 않기 위해 내근직으로

옮겨 파키스탄에서 미국으로

옮겨간 내용에서 이 영화는

다시금 고문을 하는 자 또한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당하는

입장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고문을 주도했지만 내근직으로 도망친다.

오바마 대통령이 선출된 뒤에

고문에 대한 금지령이 내린 것에

대해서 CIA 요원들이 반감을

갖는 것에는 일면 관객인 나마저

동감이 일어날 정도인데,


결과적으로는 그 고문에 의한

취조 덕에 "오사마 빈 라덴"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잡게 되었고,

그 덕분에 보다 유리한 입지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한 역사를 돌아보자면

일면 모순 감에 빠지게 된다.


영화감독은 공화당의 편도

민주당의 편도 아닌 중립적인

입장에서 결과적으로 실무에

몰입해서 성과를 꼭 이뤄내길

강력하게 원하고 노력을 멈추지

않는 관객 속의 대부분인 우리가

처한 입장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성과 목표, 돈벌이, 사랑,

명예 등을 얻기 위해 종종 자신이

가진 양심이나 인류애, 정의감을

버리고 눌러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제시카 챠스테인"은 "오사마

빈 라덴"을 잡거나 죽이고자 하는

그 목표 하나만을 위해, 자신이

초반에는 껄끄러워했고, 미안해

하기도 했던 고문과 폭력을

반복적으로 자행했고,


"빈 라덴"에게 접근하기 위해

열과 성의를 다하는 동료가

결국 너무 정보원을 믿었던 관계로

자살 폭탄에 희생당한 상황에서조차

슬픔에 온전히 빠질 수 없었던 것으로

나온다.

2천5백만불로 매수했다고 믿었던 빈 라덴의 주치의가 자살 폭탄 테러를 CIA 캠프 내에서 하면서 그의 절친하면서도 아이도 셋이나 있던 여동료도 같이 폭사한다.

극히 관료주의적인 관점에서

눈 앞에 나오는 자잘한 평가에

집중하면서 "빈 라덴"보다는 잡범을

소탕하려고 애쓰는 상사를 협박해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기도 하고,


"빈 라덴"이 있을 것이 정확한

은신처를 사진 등의 근거 부족으로

차일피일 급습하기를 주저하는

정부 각료에게 "오사마 빈 라덴"을

놓치게 될 경우의 높은 기회비용을

위협적으로 던져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은신처를 급습하게 만들도록

만든 강력한 상사에 대한 압박도,


모두가 모인 회의 석상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오사마

빈 라덴"이 그 은신처에 있을 것임을

다들 40%, 60% 같은 책임지지 않는

확률로 이야기할 때, 100%라고

단언하는 모습은 모두 그 인물이 가진

능력이나 담력 그 이상을 발휘한

집념과 열정이 잘 드러나는 장면들이다.


그 모든 노력이 성과가 되어 확실하게

"빈 라덴"이 죽었을 때, 그가 왜

기뻐 날뛰기보다는 한숨을 쉬고

울게 되었을까? (물론 거기에는

테러로 희생당한 3천명의 희생자에

대한 애도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허무나 허탈함이나 해소감 등의

한 단어나 문구로 설명 가능한 것이라고?

여러분은 내 글을 읽고도 그렇게

생각할 것인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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