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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Mar 05. 2023

<바빌론>-밤에 쓴 편지 같은 할리우드판 시네마 천국

밤에 쓰인 할리우드 영화의 황금시대에 대한 강렬하고 열정적인 회고담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글로벌 전체 영화 시장에서 쓸쓸하게 흥행이 되지 않고 사라져 간 작품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바빌론"이다. 전설 속에 그려진 낙원 같은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인류의 "7대 불가사의"에 들어와 있고, 이 공중정원과 더불어 성경에도 나와 있는 "바벨탑"의 전설은 영화 제목을 보는 순간 교회에 다녀본 적이 있는 이의 기억을 되살리는 동시에 일본 만화 "바벨 2세"에 대한 기억도 호출한다. 그러나 오래 기억될 영화 제목으론 남지 못했다.


누가 이 영화를 보아야 했을 관객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짚어보자면, 현존하는 최대의 경제활동 인구 집단중의 하나인 "X세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집중적으로 이 세대를 향한 마케팅이나 홍보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듯하다. 일단, 그렇게나 영화를 좋아하는 X세대인 나조차도 이 영화의 예고편 하나 제대로 못 보면서 헤매다 보고 말았으니.


내 글에는 정말로 가뭄에 콩이 나듯이 댓글이 하나씩 간헐적으로 달린다. 그 이유를 가장 잘 아는 것도 쓰고 있는 나 자신이다. 누군가 이렇게 글을 쓰지 말고 좀 더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고 싶어도 이렇게 대책 없이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이에게는 "가련한 이 같으니라고......" 중얼거리다 지나치기 마련이다.


이른바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는 글이 되는 이유는 격무에 시달리며 살아가다가 목이나마 축이는 듯이 영화나 드라마, 기타 영상물을 보고 적막이 찾아오는 늦은 밤이나 휴일의 저녁 무렵에 본 것을 반추하려고 시들은 에너지를 다시 밤의 혼동 속에서 피워 올리며 직진을 하듯이 뻗어 나오는 심상대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밤에 쓴 편지는 보내지 말라"라는 격언이 있다. 그 격언에 대해서 100% 가까이 동의한다. 그렇게 쓰인 편지에는 치밀한 사유보다는 감정과 흥분, 잔잔하게 팽창한 감성, 속절없이 젖어드는 과거에 대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회고가 따라붙는다. 객관화되기 어렵고 다듬어지기도 어려우며, 보는 이의 마음과 생각을 챙길  몸과 마음의 여유도 적어진 상태에서 쓰인 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도 오전이나 낮에 한가로이 글을 퇴고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영화 감상문을 종종 쓰는 나 같은 이가 그 비슷한 느낌으로 만들어진 "바빌론"을 보고서 대번에 떠오른 느낌은 무엇이었겠는가?



"데미언 샤젤"의 작품은
그런 섬광이 일어날 거란
예감을 가지고 그 같은 수준의
섬광을 마지막 부분에서
보고 느낄 수 있어야만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란
고정관념이
"라라랜드"에서 만들어졌다.


감독인 "데미언 샤젤"의 작품은 단 한편 밖에는 보지 못했다. "라라랜드"라는 불세출의 첫사랑 명작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앞 서 더 명작이란 취급을 받는 "위플래시"가 있지만, 굳이 꼭 그 영화를 봐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물론, 해외출장 중에 비행기에서 잠시 보려다가 '재미가 없어' 중단한 "퍼스트맨"이 있긴 하다.


"라라랜드"는 "감독"이 가진 능력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철저한 팀플레이와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이란 두 배우의 멋진 앙상블이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와 같이 만나서 위대한 섬광을 만들어낸 작품으로 마치 각각의 관객의 평생의 기억 속에 단 한 번만 있었던 불꽃을 찾아 피워 올린 것 같은 희귀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퍼스트맨"은 "라이언 고슬링"이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섬광이 피어오를 것 같다는 예감을 전혀 전달하지 못했다. "데미언 샤젤"의 작품은 그런 섬광이 일어날 거란 예감을 가지고 그 같은 수준의 섬광을 마지막 부분에서 보고 느낄 수 있어야만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란 고정관념이 "라라랜드"에서 만들어졌다.



그 속에는 "라라랜드"와 같은
첫사랑의 기억이
두 가지 주제로 연결된다.


아마도 "바빌론"은 그런 섬광과도 같은 마무리를 멀찍이 예전부터 떠올리면서 구상을 쌓아갔던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 속에는 "라라랜드"와 같은 사랑의 기억이 두 가지 주제로 연결된다.


첫 번째는 할리우드가 1920년대의 무성영화의 황금기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면서 벌어지는 시대의 격변을 경험한 뒤에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더 화려해지고 더 막강한 영향력과 매출, 산업의 팽창을 낳아온 역사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향수와 뒤섞인 사랑이다.


난교와 더불은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파티가 벌어지기도 하고, 영화를 찍은 유명 배우던 무명 배우던 상관없이 배우의 인권에 대한 무시와 인종에 대한 차별,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난무했던 그 시대의 미국 영화계의 암울함과 불합리함을 그대로 그려내기도 하며, 무성 영화 속에서야 막강한 인기를 구가했지만 유성 영화 시대의 퇴물이 된 배우도 나온다.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아내를 바뀌 가며 화려한 할리우드 배우로서의 매력을 흩뿌리면서 방탕하고도 무절제하게 생활하다가 영화 영상 속에 찍히는 중요한 순간에는 매력적이기 그지없는 배우로 돌변하는 "잭 콘래드"를 맡은 "브레트 피트"의 처연한 연기에 이어서 나오는 영화 산업의 팽창이 확대되는 시기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 있었던 피고 지는 인물의 변화를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다소 방관자적인 관점이 이 사랑을 바라본다.


두 번째는 타고난 배우로서의 화려함과 재능을 가득히 담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자기 파멸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팜므파탈"로서 제대로 형상화된 "마고 로비"가 열연한 "넬리 라로이"의 섬광 같은 짧은 삶과 이에 매료되어서 사랑에 빠져버린 뒤에 자신의 성공적이었던 "영화 제작자"로서의 경력을 잃어버린 "매니(또는 친해지고 싶은 이에겐 불러도 된다고 알려주는 마뉴엘) 토레스"를 연기한 "디에고 칼바"가 제대로 보여준 실패한 첫사랑이다.

출처 : EW.com 이 영화 속에서 "매니"의 눈은 할리우드에 콩깍지가 씌워진 감독과 관객의 눈을 대변하는 듯하다.



사실 "매니"의 시점은 두 가지 사랑을
모두 바라보고 있는 감독 자신의 관점이거나
영화 바깥에서 이를 보고 있는
관객의 관점이기도 하다.


"잭 콘래드"가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영화 평론가"인 "엘리노어 세인트 존"이 "잭"의 시대에 뒤떨어진 연기에 대해 내린 혹평을 접한 뒤에 자신이 더 이상 존중받을 수 있는 주연배우급의 스타도 아니고 그저 땜빵 배우에 불과함을 알아버리고선, 모든 의욕을 잃고 권총 자살을 한 장면부터 이 영화는 급물살을 타고 섬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되는대로 막살던 "넬리"가 거대한 킬러 집단에게 큰 도박빚을 지고 살해 위협을 겪을 때, "매니"가 그를 살리기 위해서 영화 소품인 위조지폐를 들고 LA의 항문이라고 불리는 처절한 매음굴 같은 곳에 찾아가 할리우드의 난잡한 파티와 일면 유사하지만 더 극단적이고 더 지독한 광기를 가진 불법적인 폭력과 난교의 현장이 나오면서 영화의 총제작자이기도 한 "토비 맥과이어"가 뒷골목의 제왕인 "제임스 맥케이"의 광기 어린 연기를 보여준 시점부터 그 진행은 더한 초 스피드로 맹렬하게 이뤄진다.


"넬리"가 "인생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야"라고 읊조리며 어둠 저편으로 사라진 뒤에, 혼자 도망간 "매니"가 "제임스"의 킬러에게 죽지 않기 위해 LA 바깥으로 도망쳐서 수십 년을 살다 다시 LA에 찾아와 그곳의 영화관에서 그때까지의(1952년) 영화의 역사는 물론이고 2020년대까지의 영화의 눈부신 영상 혁명을 담은 영화의 장면을 섬광처럼 접하는 장면에서 사실 "매니"의 시점은 두 가지 사랑을 모두 바라보고 있는 감독 자신의 관점인 동시에 영화 바깥에서 이를 보고 있는 관객의 관점이기도 하다.


극 중에 “매니”와 “넬리”의 러브 라인과 “잭”의 날개 잃은 추락은 밀접한 연관성 없이 서로 다른 두 이야기처럼 잠시 잠깐씩만 겹치고는 평행을 이루면서 사라지지만 “매니”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오가며 속속들이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눈물과 더불은 감동을 충분히 X세대의 관객은 "시네마 천국"의 "할리우드판"으로 느끼면서 볼 수 있었어야 했고, 그랬다면 적어도 이 인구 집단의 발걸음이 훨씬 더 수월하게 극장으로 향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밤에 쓰인 편지"였고, 사실은 수많은 관객을 향해서 전달되기보다는 X세대 혹은 베이비붐 세대를 향해 전달되는 것이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는 작품이었음에도 전체 할리우드의 역사와 첫사랑의 아득한 기억을 연결해서 믹스하여 눈부신 섬광으로 만들어 모두에게 던져도 통하리라는 오판을 했던 것 같다.  


그런 영화 마케팅적인 평가를 뒤로하고 어찌 되었든 이 영화의 온전한 관객 타겟층이 분명한 나는 그대로 그 섬광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나도 모르게 약간의 눈물을 여러 영화와 기억의 너머로 짜내고 있었다. 그 오랜 기억과 더불어 개인의 역사의 한줄기 기억이기도 한 첫사랑 모두가 잘 뒤섞여 나타난 것이다.


마치 지금 이 늦은 시간에 나도 모르게 홀연히 이 영화에 대한 감상문을 제대로 수정할 생각도 없이 적게 된 것처럼, 이렇게 "밤에 쓰인 편지 같은 각본으로 만들어진 영화"에 대한 감상문을 적는 바른 방법은 아무렇게도 퇴고할 생각을 갖지 않고 그저 마음과 기억에서 나오는 대로 쓰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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