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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얼려 보기

리얼 역사 하드보일드 원작 소설 VS 전형적인 판타지 활극 영화

by Roman

(출처: 연합뉴스)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영화 "파과"의 포스터였다. 그 포스터에서 하얀 머리를 하고 칼을 휘두르는 아직도 스타일리시한 배우로서의 인상을 떠올리게 하는 "이혜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어떤 작품이었는지 떠올릴만한 것은 머릿속에 없다. 하지만 출연한 작품에서 뿜어낸 독보적인 존재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도 이미 노숙함과 당당함을 풍겼던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노년의 여자 킬러"가 위기에 처해서 생과 사의 결투를 하게 된다는 작품의 내용 속에서 펼쳐질 그의 연기가 기대되었다.


그런데, 월에 한번 정도나 통신사 멤버십으로 개봉 영화를 고르고 보는 나로서는 때마다 "파과"보다는 블록버스터 한편에 매번 이 기회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원작을 전자책으로 듣기로 했다.


경제경영이나 자기 개발서에 비해서는 자주 시도하지는 않지만 가끔 소설을 오디오북이나 전자책으로 듣는다. 집중력 있게 들을 만큼 재미있는 것이 아니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싶으면 포기한다.


그런데, "구병모" 작가가 2013년에 내놓은 이 작품은 뻔할 것 같으면서도 뻔하지 않게 치밀한 현실감을 가지고 쓰인 작품으로 마지막까지 잔잔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끌려가도록 했다.


작품은 오히려 이 시대의 한국 사회의 고령화의 위기를 미리 가서 쳐다보고, 젊은 세대나 중장년 세대보다도 노년 세대가 이 사회의 다수 인구 비중을 차지하는 시대를 미리 예견하고 쓰인 듯한 느낌마저 풍겼다. 그렇게 생각하고 들어서 그만큼의 흥미가 더 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도 봤다.


2045년이 되면 65세 이상의 한국 인구가 37%에 이른다는 통계를 담은 기사(링크)를 봤다. 이미 '25년 현재 65세 이상 고령층의 비중은 20%이고 한국의 중위 연령은 46세다. 노년의 킬러가 이 소설을 듣거나 읽을 이에게 현실과 거리가 먼 색다른 소재로 통할 상황이 아닐 시대에 이른 것 같다.


이미 노년에 이른 암살자는 소설 속에서 생계를 다소 넉넉하게 유지하는 마땅한 방법이 암살밖에 없다. 점점 힘을 잃어가면서 초라해지는 자신을 추슬러서 자기에게 주어지거나 자기가 하겠다고 하는 암살 일을 맡는 존재로 나온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전설적인 킬러로 묘사되어 설명이 압축된다.


"파과"는 부서진 부분이 있는 과일을 뜻하는 단어이고, 이 작품 속 주인공의 암살자로서의 이름은 "조각"이고 사람으로서의 이름은 "순덕"이다. 어딘가 어린 시절과 성년기를 거쳐가는 과정에서 심각하게 마음의 한쪽이 파괴되고 잘려나간 과거사가 잘 드러나야 했는데, 그게 부족해보였다.


"방역"일을 한다는 표현으로 운영되는 주인공 "조각"을 고용한 회사는 사회의 해충을 죽이는 일을 한다. 그 해충이 사람이란 것이 섬뜩해야 맞겠지만 그 일은 아주 해묵고도 너절해져서 비슷한 일을 하는 업체가 넘치고 있고, 에이전트 일을 하는 회사도 예전 같지 않게 허술해진 상황도 그려져 현실 같다.


사회의 해충이란 표현을 써서 "방역"일이 일면 정의로운 일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이미 돈을 내고 사람을 죽여달라고 하는 집단의 성격이 한국의 역사적으로 권력과 부를 움켜쥔 쪽에 있다 보니, 일의 성격은 죽일 대상이 해충인지 아닌지조차 모호해진 상황으로 나온다. 그저 주어진 생업이 살인인 거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래도 명분상으로는 사회의 해충을 박멸하고 배신자를 처단한다고 한다.


필연적으로 이 같은 암살 일을 생업으로 하게 된 "조각"의 디테일은 솔직히 오디오북으로 들을 때는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쓰고 분량을 할애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영화를 보면서야, 현실성이란 느낌이 많이 사라진 판타지에 가까운 형태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극의 진행을 보면서 원작이 "파과"가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 때문에 더 맛있어진다는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조각"의 첫사랑인 "김무열"배우가 연기한 "류"와의 첫 대면 장면은 스토리를 압축하기 위해서 소설에선 중반부쯤 나온 내용이 영화에선 첫 부분에 축약되서 나온다. "조각"의 가난한 유년기의 삶에서 남의 집에 얹혀살다가 타고난 완력으로 덩치 큰 오빠를 제압한 내용 등의 "조각"이 암살자로서의 자질 같은 것을 지니게 된 내력이 사라진 것도 아쉽다. 대신에 "조각"과 "투우"간의 서사가 더많이 가공되어서 추가 되었다. 감독의 선택이니 존중한다.


(출처: IMDB)


"류"가 자신이 하는 1960년대의 "방역" 사업에 "조각"을 끼워 넣게 된 중요한 사건이 "덩치 큰 흑인 미군"이 자신이 화대를 지불한 여자로 착각하고 그를 범하려 할 때 젓가락을 목에 찔러 넣어 죽이는 대목에서 군인을 "백인"으로 바꾼 것은 최근의 인종차별 배제 트렌드의 영향이라 생각했고, 젓가락보다 훨씬 더 크고 긴 쇠꼬챙이를 사용한 것은 화면상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조각"이 "류"를 사랑하게 된 계기는 내면의 독백을 통해서 다소 길게 설명되지만 영화에서는 설거지를 하다 입은 손가락의 상처를 밴드 치료하는 장면에서 어린 조각을 연기한 "신시아"의 눈빛으로 설명되고, 효율적으로 극화 속 현실에서 자신을 치료한 "강수의사"가 손에 붕대를 감아줄 때 변화하는 "이혜영" 배우의 눈빛이 변하는 장면과 연결되며 다른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을 한번에 드러낸다. 이것은 원작 소설을 뛰어넘는다.


결정적인 원작과 영화의 차이는 "블록버스터급"으로 제작비를 들여서 찍는 만큼 꼭 흥행을 해야 하니 "이혜영"의 "조각"이 훨씬 더 지능적이고 치밀하며, 동시에 노년 답지 않은 빠른 완력과 다수의 적을 일거에 소탕하는 전설적인 싸움 능력을 가진 "히로인"처럼 그려지는 영화와 달리 소설은 힘이 빠지고 치명적인 실수를 반복하는 "조각"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투우"와의 힘겨운 사투를 버티는 것이다.


원작에서는 마지막까지 사실 훨씬 젊고도 여유만만하며 치밀하면서도 빠르고 더 강력한 암살기를 가진 압도적인 느낌의 "투우"가 일방적으로 "조각"을 밀어붙여 가는 장면에서 "조각"에게 감정을 이입한 사회적 약자라고 어느 정도 자신을 느낄 수 있는 독자가 "조각"의 승리를 간절히 염원하며 깊숙이 맺어진 한편과도 같은 관계를 가질 수도 있을 정도지만 영화 속의 "조각"은 이입에서 벗어난다.


그렇다고 세련되고도 강력하고 자신을 매일매일 산을 뛰면서 관리하는 것이 멋지게 나오는 이 신식의 여노년에 대한 선망 같은 감정은 잘 일어나기가 어려울 수 있다. 40~60대의 관객을 노렸다면 대량 살상신을 표현하기 위해 지워버린 세세한 감정의 형성씬과 인물의 역사적 일대기를 살렸어야 했다. 후반부의 콜트 45구경 등의 총기를 사용하게 된 내력으로 이전 시대에 총을 썼던 내용도 나와야 했다.


액션 영화에 대한 관객은 주로 2-30대일 것인데, 그들이 이런 스토리에 대해서 이전 시대와는 다른 느낌을 받으며 신선함을 느끼기도 그다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갈갈이 찢어진 이 젊은 세대의 관심은 사회적 약자가 역전해서 이기는 스토릴 반기지 않을 비중이 커졌다.


여기에 원작소설 "파과"가 다루는 정도급의 스토리라인에서는 화끈한 대량의 액션씬이 쥐어짜듯이 나오는 형편이라, 흥행작으로서의 좋은 평가를 받기에는 많은 난관을 갖고 있었다. 스토리를 상업적인 성공을 기대할 수준의 판타지 액션 활극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극복이 어려웠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쓰인 원작 소설 "파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이 잘 만들어진 작품을 시대에 맞게 각색하여 관객과 시청자에게 선사한 것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런저런 한계 속에서도 "이혜영"은 독보적인 수준의 연기를 몸 사리지 않고 잘 보여주었다. 원작을 선후 관계나 인적 관계면에서 많이 각색은 했지만 적지 않은 부분에서 원작을 존중한 장면과 대사를 그대로 남겼다.


최근에 "와차"에도 올라와 있기 때문에, 극장까지 먼 걸음 하기엔 시간이 부족한 40~60대 분들에게 이곳에서 이 작품을 보기를 추천한다. 물론, 원작도 읽어볼 만하다. 영화만을 봤다면 위와 같은 글은 쓰지 못했을 것이다. 원작을 봤던 탓에 더 재미있게 볼만한 부분이 있었고, 지적할 부분도 생겼다.


원작과 영화를 맞물린 인상을 하나의 그림으로 얼려 본다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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