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결혼식 사회는

by 알뜰살뜰 구구샘

<결혼식 사회를 망치다> 3편입니다.



"결혼식 사회 좀 부탁한다."


맨 처음 든 생각은 '망치면 어떡하지'였다. 사회자는 잘 봐도 본전이고 못하면 욕먹는다. 친구와 제수씨만 만족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양가 부모님을 포함한 많은 하객도 고려해야 한다. 긴장은 하지 않더라도 부담은 가져야 하는 자리다.


하지만 부담감은 잠시였다. 바로 고마움이 밀려왔다. 그 친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었다. 걔는 의리 있는 녀석이다. 주위에 좋은 친구가 정말 많다. 그 쟁쟁한 분들을 뚫고 내가 선정되었다. 짜식, 너 나를 이 이렇게까지 생각했단 말이지?


결혼식 사회는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 우선 믿음이 가야 한다. 사회자가 당일에 늦잠을 자면 어떻겠는가? 전날 과음해서 컨디션이 안 좋으면? 보통 친구들 중 가장 신뢰가 가는 친구에게 부탁하게 되어 있다.


발음도 좋아야 한다. 물론 아나운서의 퍼포먼스를 바라는 건 아니다. 명료하기만 하면 된다. 사투리를 써도 상관없다. 하객도, 혼주도, 신혼부부도 9시 뉴스 앵커를 기대하는 건 아니다. 신부가 입장해야 하는데 퇴장하지만 않으면 된다.


예비부부와 합도 잘 맞춰야 한다. 결혼식 진행은 사회자 개인기로 하는 게 아니다. 철저히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 사회 대본도 마찬가지다. 초안을 받아서 끊임없이 수정해야 한다. 연습할 때 실수를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당일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다.


그 녀석의 기준에 내가 부합했나 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영광이었다. 나에게 이런 기회를 주다니, 고맙고 또 고마웠다.


신랑과 알게 된 지는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학창 시절 친구가 아니라는 소리다. 사회에 나와서 만났다. 내 첫 발령지에 그 친구가 먼저 근무하고 있었다. 20대 중반에 만난 우리는 이내 전우가 되었다. 군대도 아닌데 웬 전우냐고? 근무하던 학교가 거의 전쟁터였다. 주중엔 각종 일로 바빴다. 계획서와 보고서를 함께 짰다. 저녁엔 술상무로 소환되었다. 주말엔 막걸리를 짊어지고 등산에 차출됐다. 직원여행 가이드도 해야 했다. 코스 기획, 식당 섭외, 운전수 역할, 결제 관리 등을 도맡았다. 혼자였으면 의병제대 했을 것이다. 둘이 함께해서 만기 전역할 수 있었다.


일단 수락은 했지만, 바로 걱정이 밀려왔다.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하지? 내 결혼식 사회를 봐준 친한 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많은 팁을 전수받았다.


한 달 전쯤 대본 초안을 넘겨받았다. 신랑과 신부가 공들여 만든 티가 났다. 우선 있는 그대로 소리 내 읽었다. 입에 착 붙지 않는 부분을 바꿨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휴대전화가 무음이나 진동인지 확인해 달라는 멘트가 있었다. 핸드폰보다는 휴대전화가 표준어에 더 가깝다. 나도 그건 안다. 그런데 '-화'는 잘못하면 '-하'로 발음할 수도 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휴대폰'으로 바꿨다. 대본 전체를 소리 내 읽으며 이 작업을 반복했다.


다음으로 아내 앞에서 소리 내 읽어 보았다.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했다. 천천히 읽어 보란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읽었다. 내가 듣기에도 훨씬 좋았다. 예비신랑에게 통화를 해서 들려줬다. 신랑도 만족했다.


마침 주말에 다른 친구 결혼식이 있었다. 간접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평소였으면 축의봉투만 챙겨갔겠지만, 이번에는 대본도 함께 챙겼다. 그리고 내내 사회자만 쳐다봤다. 마침 전문 사회자가 진행을 맡았다. 보고 배우기에 딱 좋았다. 발성부터 표준어 구사까지 완벽했다.


주위를 둘러봤다. 하객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확인했다. 30분 동안 사회자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부 신부와 신랑만 바라봤다. 사회자가 갑자기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모를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그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그날은 내 딸이 태어난 이틀 뒤였다. 딸은 예정일보다 23일이나 일찍 태어났다. 어떤 사람은 애한테 안 좋을 수도 있으니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가지 말라고 했다.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공간에 가는 걸 걱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러겠는가? 나는 결혼식 사회자다. 요즘은 주례 없는 결혼식이 일반적이다. 단상 위에 있는 사람은 혼주와 부부를 제외하고 나뿐이다. 내가 안 가는 건 말이 안 된다.


예식이 시작하기 2시간 전쯤 식장에 도착했다. 그 식장은 처음 가 보는 곳이었다. 구조를 익히기 위해 조금 더 일찍 갔다. 앞 타임 결혼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친구보다 일찍 식을 진행한 팀은 없는 것 같았다.


식 시작 20분 전에 단상 근처로 갔다. 진행요원이 꽃을 줬다. 가슴팍에 꽂으란다. 식장에서 꽃을 꽂고 있는 사람은 직계 가족과 나뿐이다.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준비한 대본을 단상 위에 올렸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났다. 단상 위에 조그만 조명이 있는 것이었다. 코브라처럼 생긴 아주 작은 플래시였다. 용도를 물으니, 식 진행하는 동안 켜는 용도란다. 결혼식이 시작되면 모든 조명이 꺼질 거란다. 조명은 오직 신랑과 신부에게만 허락된단다. 그래서 사회자는 아주 작은 불빛에 의지해 대본을 읽어야 했다. 그래도 20분 전에 미리 알아서 다행이다.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10분 전에 처음으로 안내멘트를 쳤다. "잠시 후, 신랑 홍길동 군과 신부 심청 양의 결혼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하객 여러분들께서는 식장 안으로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KF94의 위력이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고성능 마스크를 끼니 숨쉬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챙겨 온 가방에 AD마스크가 있었다. 황급히 바꿨다. 5분 뒤, 한 번 더 똑같은 멘트를 쳤다. 한결 숨쉬기 편했다. 휴, 다행이다.


식을 시작한 이후는 잘 나지 않는다. 실수를 했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다른 친구들이 칭찬은 좀 해줬다. 괜히 으쓱해졌다. 처음 한 것 치고는 잘한 것 같았다. 나도 몰랐던 소질을 발견한 줄 알았다. 물론 그 마음은 2년 뒤 두 번째 사회를 보면서 무참히 깨져버렸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잘한 게 아니었다. 식장의 시스템이 좋았다. 그 식장에선 사회자 옆에 전담 직원을 한 명 붙여주었다. 단정한 정장을 입은 여직원이었다. 그분이 내 옆에서 수신호를 계속 줬다. 말을 멈춰야 할 때엔 손바닥으로 대본을 가렸다. 다시 읽어야 할 땐 손을 뒤집어 읽으라는 표시를 했다. 나는 그 표시에 따르기만 하면 됐다. 내가 아닌 그 누구를 그 자리에 갖다 놓아도 잘했을 거다.


나의 첫 결혼식 사회는 이렇게 끝났다.

2년 뒤, 두 번째 사회 의뢰가 들어왔다.



4편에 이어집니다.

사진: UnsplashSangga Rima Roman S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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