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경, <법관의 일>
대학교 다닐 때 일입니다. 사회과 교수님 한 분이 계셨어요. 유독 질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물으셨죠.
Freedom과 Liberty의 차이는?
비슷하게라도 맞히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신답니다. 남은 수업 안 들어와도 다 출석한 것으로 쳐주겠대요. 게다가 기말고사도 안 쳐도 된답니다. 무조건 A+로 인정해 주겠다고 하셨죠.
기회는 공평하게 돌아갔습니다. 먼저 맞히려고 손을 들 필요는 없었어요. 강의실 안에 있는 모든 학생에게 발언권을 다 줬거든요. 거절의 자유는 없었습니다. 무조건 뭐라도 말해야 했습니다.
제 차례가 오기 전까지 머리를 쥐어짰습니다. 얼마 없는 배경지식으로 최대한 버무려 봅니다. 앗, 어느새 제 차례가 왔습니다.
"교수님, Freedom은 권위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영화에서 감옥을 탈출했을 때 I'm free라고 외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freedom은 제도 안에서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Liberty는 천부 인권적인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있습니다. 영어로 Statue of Liberty죠. 자유민주주의가 꽃피운 미국의 상징물에 들어가는 낱말입니다. 그러므로 천부 인권적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제 답변이었습니다. 마른 수건 짜듯 배경지식을 짜냈죠. 교수님께서 껄껄 웃으셨습니다.
그럴듯한데,
정확히 반대로 말했네
[사전에 나오는 진짜 뜻]
-Freedom: (권리로서의) 자유
-Liberty: (지배, 권위 등으로부터의) 자유
다시 자유의 여신상을 봅니다. 왼손에 책이 있네요. 헌법인 것 같습니다. 저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 안에서 자유롭게 노세요"
물론 수업은 종강까지 다 들어야 했습니다. 기말고사도 당연히 쳐야 했죠. 하지만 그때 기억은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10년 넘은 지금도 생생하네요.
일상생활에서 판사를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는 종종 나옵니다. 죄지은 사람들은 낮은 곳에서 벌벌 떱니다. 판사님은 높은 단상에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계십니다.
영화 속 판사님께서 판결문을 읽습니다. 법봉을 땅땅땅 두드립니다.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습니다. 법원 안 최고 권력자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은 판사님이 쓰셨습니다. 경력이 20년입니다. 심지어 서울대 나와서 사법고시를 패스하셨답니다. 문과의 끝판왕 느낌입니다. 서울대, 사법고시, 판사 경력 20년이 합체합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책에서 계속 말해 주십니다. 응, 그거 아니래요.
책을 보고 느낀 법관의 실상을 픽션으로 정리하면
국회(입법부)는 프랜차이즈 본사 회장입니다. 법관(사법부)은 가맹점 사장님이네요. 본사에서 레시피를 보내줍니다. 손님이 순대를 원하면 소금을 함께 제공하래요. 가맹점주는 생각합니다. '여긴 경상도인데, 쌈장을 내보내면 안 되나?' 하지만 그러면 가맹 취소당합니다. 그냥 본사 매뉴얼을 지킵니다.
손님들이 항의합니다. 점주가 달래도 소용이 없습니다. 가맹 계약서를 가져와서 보여줍니다. 손님은 이미 얼큰하게 취하셔서 글자 읽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손님이 문의를 합니다. "저, 굵은소금으로 주시면 안 될까요?" 사장님은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굵은소금은 소금이니까 줘도 될까요?
더 이상 법관이 법원의 왕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가맹점 사장님보다 본사 회장님이 열쇠를 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다 아는 분입니다. 국회의원은 투표로 뽑습니다. 투표는 우리가 합니다. 결국 우리가 프랜차이즈 회장님입니다. 매뉴얼은 우리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법관은 문서로 판단한다고 합니다. 형사, 검사, 변호사가 작성한 서류를 본답니다. 복잡한 경우엔 여러 판사가 함께 본대요. 형사사건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있습니다. 결정적 증거가 있으면 간단하대요. 그냥 판결하면 된답니다. 그런데 정황적 증거만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답니다. 애매하면 피의자를 풀어줘야 한대요.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상황, 참으로 난감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10명의 피의자를 놓아주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는 게 지금의 법이라고 합니다.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닌 형사, 이런저런 증거들을 모아 소장을 제출한 검사, 애매함 때문에 피의자를 풀어줘야 하는 판사의 얼굴이 굳어집니다. 아무리 봐도 진범인 것 같은 피의자는 웃으면서 법정을 나갑니다. 이제, 누가 더 자유로울까요?
저자는 소설가가 꿈이었다고 합니다. 그 꿈은 지금도 유효하대요. 그래서 그런지 책이 술술 읽힙니다. 딱딱한 법전을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부드러운 드라마 각본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제게 법관은 참 생소했습니다. 법원에 상주하는 npc 같은 느낌이었죠. 하지만 그분들도 결국 저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출퇴근 시간 준수해야 하고, 맡은 일 열심히 쳐내야 하는 직장인이었죠.
저자는 일상도 많이 담았습니다. 하루는 우울한 사건을 판결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대요. 마음이 답답했다고 합니다. 캔맥주 하나 사서 공원 풀밭에서 마셨대요. 괜스레 판사님과 동질감이 느껴집니다. 저도 속상한 일이 있으면 맥주로 달래곤 하거든요.
맥주 한 캔 할 자유는 Freedom일까요? Liberty일까요? 어후, 그런 것 모르겠습니다. 거품이 꺼지기 전에 얼른 한 모금 마셔야겠습니다. 도비는 자유예요!
송민경, <법관의 일>을 읽고 작성했습니다.
(사진: Unsplash의Kristina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