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 폐인의 사랑과 슬픔
OTT 플랫폼 웨이브에서 2000년대 인기 드라마들을 다시 소환하는 뉴클래식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전편을 모두 다시 볼 수도 있고, 6화 정도로 압축한 감독판으로 볼 수도 있다. 이 프로젝트에 방영 20주년을 맞은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포함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본방 사수는 물론 대사를 줄줄 외웠던 '미사 폐인'으로서 놓칠 수 없어서 다시 웨이브를 구독했다. 벅찬 마음으로 네이버에 검색해 보니 첫 방영일이 2004년 11월 8일이다. 같은 해 12월 28일에 종영했으니 오늘로 딱 20년이 넘었다. 20년! 그만큼 나도 나이를 먹었으니 새삼 놀랄 것도 없지만, 드라마는 다시 봐도 감동의 물결이었다. 20년이 지나는 동안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장면도 몇몇 보였지만, 여전히 '미사'는 '미사'였다. 20년이 지난 2024년 연말,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미사 폐인'이 됐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에게 버려져 호주로 입양된 차무혁(소지섭)과, 스타의 코디네이터 송은채(임수정)가 주연이다. 호주에서 자신을 배신한 연인을 살리려다 머리에 총을 맞고 시한부가 된 무혁과 윤의 코디네이터로 그를 몰래 좋아하지만 한 번도 표현한 적 없는 은채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처음 표현하면서 벌어지는, 말 그대로 지독한 사랑 이야기. 자신을 버린 엄마 오들희(이혜영)가 끔찍이 아끼는 아들 최윤(정경호)을 보고 무혁은 복수를 다짐하지만, 결국 사랑으로 용서하고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따뜻해요? 외롭지 않죠, 이제?"
은채와 무혁은 호주 뒷골목에서 처음 만난다. 뒷골목에서 자라 남을 등치는 데 익숙한 무혁은 어쩐지 짐을 잃고 방황하는 은채를 도와주게 된다. (무지개 니트 입은 은채가 너무 귀여워서 아닐까) 이 때문에 은채는 나중에 엄마를 찾아 한국에 온 무혁을 보고 자신을 짝사랑해 찾아온 거라 오해한다. 복수심에 불타는 무혁과, 윤을 짝사랑하다 마음이 다쳐버린 은채가 서로를 처음으로 보듬는 장면에서 저 대사가 나온다. 무혁이 노래방에서 애국가를 목청껏 부른 다음, 가로등 아래에서, 은채가 안아주면서, 이때 눈물 한 방울을 뺨에 흘리는 무혁의 비주얼은 숨 막히게 멋있다. 그리고 저 대사. "따뜻해요? 외롭지 않죠, 이제?" 고독한 시한부 무혁의 얼어붙은 마음에 그야말로 봄날의 햇살 같은 위로 아니었을까. 고독에 익숙한 사람은 저 말이, 봄날의 햇살 같은 따스함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안다.
"배고파요, 라면 좀 끓여주세요"
무혁은 자신을 버린 엄마 오들희에게 처음부터 복수심과 사랑을 동시에 느꼈다. 오들희의 집에서 윤과 그녀의 행복한 사진들을 보면서 복잡한 감정을 느껴 무혁은 눈물을 흘렸고, 오들희도 마침 슬픈 영화를 보다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무혁과 처음 만난다. 모자의 첫 상봉은 서로에게 눈물이었다. 물론 오들희는 끝까지 무혁이 자신의 아들인 걸 모르지만. 자신은 버려놓고, 다른 아들은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심장 이식까지 욕심 내는 엄마를 보면서 무혁의 세상은 철저히 무너졌지만, '엄마라서' 그리고 사랑해서 결국 용서한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오들희에게 무작정 라면을 끓여달라고 한 것은 그래서다. 무혁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다. 처음에 동거녀 지영의 결혼식장에서 무작정 김치 담가달라고 한 것도. 윤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고 아프리카로 떠나려는 은채를 잡아두기 위해 깍두기를 담가달라고 한 것도. 그리고 자신의 존재도 모르는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라면을 끓여달라 한 것도. 사랑을 모르고 자란 무혁이 깊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모자의 마지막도 서로에게 눈물이었단 점 역시 서글프다. 무혁은 라면을 먹고 다음 생에도 어머니 아들로 태어나겠다며 눈물을 훔치고, 라면 그릇을 설거지하던 오들희 역시 영문 모를 눈물을 흘린다. 떠나는 무혁에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오들희에도 비극적인 마지막이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죽음을 앞둔 무혁이 은채에게 전화로 하는 말. "돌팅아, 미안하다, 사랑한다."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은채를 밀어내고, 그래도 다가오는 그녀를 거부하지 못하고, 그녀 때문에 너무도 살고 싶어질까봐 결국 마지막에 도망쳐버린 무혁이 이번 생에 연인에게 전하는 마지막 고백이자 인사다. 20년 전에 이 대사를 들었을 때는 '사랑하는데 왜 미안할까, 그럼 끝까지 같이 있으면 되잖아!'라고 울부짖었는데, 20년 후인 지금은 너무나 절절하게 와닿았다. 그래, 사랑해서 미안한 경우도 있다. 내 사랑을 미안해해야 하는 그 비극적인 감정. 그 감정을 너무 잘 알아서 또 울고 그만큼 나이 먹었단 사실이 서글퍼서 또 한 번 울었다.
박효신의 '눈의 꽃'
OTT의 감독판 버전에는 특별한 반전이 있다. 이 드라마의 가장 유명한 OST '눈의 꽃'은 박효신의 절절한 목소리가 드라마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려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이번 감독판에는 드라마 내내 도영 버전의 '눈의 꽃'이 흐른다. 물론 이 버전도 너무 좋지만, 미사 폐인 입장에서는 조금 아쉬웠다. 그런데 마지막 회 마지막 장면에 박효신의 '눈의 꽃'이 마침내 흐른다. 이건 정말 미사 폐인을 위한 제작진의 숨겨진 선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를 보고 갑자기 은채의 무지개 니트가 입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해 봤더니 이미 단종된 제품이라 새 제품을 살 수 없었다. 나처럼 다시 추억을 소환하고 싶은 사람들이 옷을 구한다고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려놓은 글들이 많이 보였다. 한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30만 원에 팔렸다는 뉴스도 봤다. 플레이리스트에 박효신 도영 그리고 원곡자인 나카시마 미카의 '눈의 꽃' 세 가지 버전을 나란히 추가해 놓고, 그 시절 미사 감성에 흠뻑 빠져보는 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