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장불입'에 깔린 정서
앞선 발행글 [조직을 망치는 '내정자들']에서 이어집니다.
결국, 낙하산은 팀장직을 꿰찼고, 지원자들을 기만하는 합격 공고가 새삼스레 떴다. 그간 혹시 정상적(?)으로 채용 과정이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몇 번 가졌지만, 동화 속 해피엔딩은 현실엔 없는 것이었다.
확정 다음 날부터, 이 사람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우선 회의를 명분으로 팀원들을 사무실 바깥으로 불러냈다. 모두가 자리를 비우면 곤란하니 사무실에 마련된 회의실에서 회의하자는 일부 의견이 있었지만, 그녀는 가볍게 묵살했다. 아직 정식으로 팀장 자리에 앉기 전, 다른 부원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였다. 결국 우리는 근무시간에 모두 자리를 비우고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업무 조정이 불가피한데, 생각들 해보시라고 불렀어요."
그녀는 업무 조정을 자신의 크나큰 권한으로 여기는 듯했다. 팀장 자리를 물밑에서부터 거래할 때부터, 결정이 되기 전부터,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업무 조정을 언급했다. 시급하지 않은 일이었고, 본인이 알아서 하면 될 일이었다. 일의 특성상, 업무 조정이라는 것이 천지개벽 수준의 난이도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래봤자 세부 조정에 불과해 누가 뭘 맡든 맡지 않든 팀원들에게는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팀장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권한 하나하나를 과시하고, 행사하고 싶어 했다.
게다가, 생각해 보라는 표면적 말과 달리 그녀는 팀원들의 의견을 대부분 묵살했다. 이 의견이 나오면 그건 이래서 안 되고, 저 의견이 나오면 그건 그래서 안된다는 식이었다. 30분쯤 이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보니,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라는 강한 반감이 들기 시작했다. 팀원들의 의견은 모두 그럴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고, 팀장은 그중 취사선택을 하거나 참고만 하면 끝날 일을, 예비 팀장은 모조리 거부했고 모조리 반대했다.
"그럼 원하시는 안을 한번 가져와서 그거로 다시 이야기해 보는 건 어떨까요?"
참다못해 저 말을 뱉었을 때, 말투가 공손하지 않았다는 건 인정한다. 그동안 참았던 짜증과 반감이 어느 정도는 묻어났으리라. 그녀도 조금은 눈치챈 걸까. 잠시 나를 째려봤다.(분명히 째려봤다.) 팀원들은 내 말에 격하게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답 없는 회의를 언제까지 할 순 없는 노릇이다. 30분간 도돌이표 같은 말을 반복했을 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답은 정해져 있다. 새 팀장은 요식 행위로써 "우리가 동의했다"는 명분을 가져가기 위해 지금 우리를 세워 놓고 말도 안 되는 시간 고문을 벌이는 중인 것이다. 그녀는 내 말을 듣자마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안을 가지고 오면, 그땐 낙장불입이에요. 수정은 없어요."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가끔 고압적 태도로 "감히 너 따위가"라는 태도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2025년 자본주의 사회에서 참으로 코웃음 나는 일이지만, 실제로 이런 경우가 굉장히 많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애석하게 눈치채지 못하고, 리더의 뜻이 지배인 줄 알고 범하는 오류다. 하지만 돈을 좇듯, 권력을 좇는 걸 죄라고 할 순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드러내는가, 아닌가인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새 팀장은 후자에 속했다. 제대로 된 능력도 검증받기도 전에 낙하산으로 관리직을 꿰차놓곤, 완장질에만 몰두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낙장불입. 의미를 곱씹었다. 지금 내가 몸소 너희 의견을 들어주곤 있지만, 결국 답은 정해져 있고 내 맘에 들 때까지 너희가 의견을 도출해 내면 그제야 내가 손수 업무 조정안을 짤 것이다. 나의 수고스러운 타자질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 안은 수정할 수 없이 박제될 것이다. 너희는 그것에 따르면 될 일이다. 내가 한 번의 일을 했는데 감히 수정하려고 든다고? 이 뜻이잖아?
우리는 공주를 모시는 신하가 아니다. 그건 부당했고 무례했고 굉장히 수준 낮은 발언이었다. 나는 즉시 "왜 낙장불입인가요? 회의를 해서 그때 결정하면 되는데?"라고 되받아쳤다. 아마 목소리에 반감과 짜증이 가득 묻어났을 것이다. 차분하게 말했다면 더 좋았을 걸! 나중에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같은 상황이 와도 나는 꼭 저 말을 뱉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저 아둔한 낙하산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팀원 위에 군림하려고만 할 것이다.
그녀는 내 질문에 적당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건 당연했다. 대신 의견을 청취하려는 취지였다는 말을 또 한 번 반복하긴 했다. 그건 그녀의 특기였다. 언제나 A를 물으면 B를 답하고, B를 물으면 C-를 말해버린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던 건 굳이 불필요한 마찰을 만들 필요가 없어서라는 걸 알기나 할까. 하지만 낙장불입 한 마디에 그녀의 밑바닥이 드러나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회의를 이어갈 이유는 없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팀원들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곤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다음 주 제가 휴가인데, 제가 없는 동안 제 일 좀 팀원들이 나눠서 해주셔야겠어요."
5월 황금연휴를 앞두고 그녀는 일찌감치 연휴 앞에 연차를 붙여 장기 휴가를 가는 방식으로 그 기간 연휴를 선점했다. 장기간 자리를 비우게 되니 자신의 일을 나눠서 그동안 하란 말이다. 하지만 그건 팀의 규칙을 깨트리는 일이었다. 그녀는 엄밀히 아직은 같은 팀원으로, 우리에겐 저마다 할당된 일이 있다. 휴가나 일로 자리를 비울 때 동료의 일을 봐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팀은 조금 특수해서 본인이 본인 일을 책임져야 한다. 즉 내가 할 일은 내가 해놔야 휴가를 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중간에 급한 일이 생기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휴가를 계획했다면 그전에 미리 일을 하고 가는 게 팀의 룰이었다. 게다가 내가 입사했을 때 그녀가 가장 강조한 것도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였다. 나나 다른 팀원들도 하루이틀 휴가를 쓸 때도 노트북으로 자기 일을 하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아무런 설명도 이유도 없이 그 법칙을 깨트렸다. 게다가 그걸 부탁하지도 않고 "당연한 내 권리니 너네가 좀 해"라는 투로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이쯤 되자 깊은 한숨이 나왔다. 나는 상사를 잘못 만나도 한참 잘 못 만났다. 편의를 위해 마음대로 규칙을 깨트리고, 정해진 답이 나올 때까지 의견을 듣는다는 형식으로 답을 유도하고, 어떤 틈에서도 군림하려는 사람을. 자신의 능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실무는 하기 싫고 상급자로 사람들을 마치 아랫사람처럼 부리고만 싶은 사람을 만나고야 만 것이다. 게다가 아직 정식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최악의 수준의 사람을.
팀원들의 회의감이 짙어질수록 회의에서 발언하는 사람은 적어졌다. 무슨 말을 해도 다 거부하고 무슨 질문을 해도 공격으로 받아들이니(사실 일부 질문은 공격이 맞았지만). 대화를 지속할 이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피곤해졌다. 대부분 반응이 시큰둥하자 그녀는 회의를 끝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나 반복될까. 이런 것도 신종 괴롭힘이 아닐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이 또한 흘려보내야겠지. 그 생각이 나를 더 막막하게 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얼마큼 참고 흘려보내야 하나. 왜 빌런은 점점 다양해지는데 나는 한결같이 흘려보내고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 하지만 그것 말고 답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알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려운 사회생활. 어느 정도 내공이 쌓였다 싶으면 또 다른 방식의 난관을 마주하게 되는 이 무거운 삶의 무게.
며칠 괴로운 생각에 휩싸이자 이제 이런 류의 생각들은 흘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의미하고 부정적인 생각과 사건들이 내 시간을 잡아먹게 하고 싶진 않았다. 마음을 다잡아도 내일 또 다른 역대급 발언과 행동으로 날 힘들게 하겠지. 란 생각에 미치면 정말 짜증이 밀려오지만, 그래도 이따위 일에 무너지는 사람이 되진 말자고 다짐했다. 매일 마음이 무너지고 다시 쌓는 일을 반복해도, 조금은 더 나은 내가 됐다고 믿으며.
그래도 화는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