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주사 이야기1
'너무 좋다. 너무 좋아! 너무 설렌다! 심장이 터질 거 같아! 너무 행복해! 너무너무! 너무 좋아!!!'
어젯밤 너무 설레 잠을 설쳐서인지 평소 메던 넥타이인데도 좌우 대칭이 잘 안 맞는 것 같아 몇 번을 고쳐맸다.
그렇게 꿈꾸던 공무원이 되고 드디어 출근하는 첫날.
비록 다른 공무원 분들보다는 조금 늦은 마흔을 앞둔 나이에 된 9급 공무원이지만, 너무너무 마음이 들뜬다.
전 직장 다닐 때는 차도 없이 새벽같이 지하철 타고 1시간 넘게 출근을 했어야 했는데, 이제는 새로뽑은 이렇게 멋진 내 차를 타고 집에서 정확히 15분이면 도착하는 시청으로 출근을 한다니. 너무너무 좋다. 가만히 숨만 쉬는데도 워라밸이 수직상승 폭발할 것만 같다.
"오빠, 새 직장 출근 축하해! 조심히 다녀와! 차조심! 사람조심!"
집 현관문을 나설 때 문 앞에서 나를 향해 환한 웃음으로 응원을 건네주던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전 직장에서 너무 고생을 해서인지, 아내도 새 직장, 그리고 그렇게 꿈에 그리던 공무원이 된 내가 자랑스러운 것 같다. 나도 내가 이렇게 자랑스러운데, 아내는 오죽할까.
나는 항공사에서 10년을 근무했다. 폼나는 스튜어드 이런 건 아니고, 수출회사들이 수출하는 화물들을 비행기에 선적하는 업무를 주로 하는 항공화물 부서에서 근무했다. 그래도 신사의 나라의 국적항공사라서 업계에서는 꽤 알아줘서 그 맛에 취해서 열심히 일했다. 한때는.
"그게 빛 좋은 개살구였던 것도 모르고... 지금이라도 탈출해서 다행이지, 망할 것들. 하! 잊자 잊어! 이제 나는 무려 주 공무원이라고!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멋진 공무원! 그게 바로 나 주 공무원님이시라고! 길을 비켜라!"
기분도 좋은데 길까지 빵 뚫려서 힘껏 자동차엑셀을 풀로 밟아본다. 공무원 된 기념으로 이전 직장 퇴직금을 몽땅 현찰 지불해서 새로 산 내 차도 신나는지 빵빵 잘도 달린다. 그동안 지하철 타고 서울로 출퇴근하던 병든 닭 같던 내 옛날 모습과 너무 달라진 내 모습에 덩실덩실 신이 난다.
"와, 주차장도 겁나 크네. 여기쯤 대면 되겠지."
시청 주차장이 이렇게 큰지 몰랐다. 전 직장은 서울에 차 댈 곳 없다고 직원들 차 갖고 오지 말라고, 임원들만 차 댈 수 있는 구역을 지정해서 뿌려대던 메일만 수두룩했는데. 역시 백번 생각해도 백번 공무원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주차된 차들이 꽤 많아 보인다. 아직 공무원 근무 시간도 아닌데, 시민 분들이 벌써 이렇게 와서 차를 댄 건지 의아하다. 이 시간에 시청에 와본 적이 없으니 이 광경이 참 새삼스럽다. 그래도 여유롭게 주차를 마치고 마침내 시청 건물로 발길을 옮긴다.
<신규 임용 공무원 오리엔테이션 3층 대강당>
1층으로 들어서니 내가 가야 할 곳을 크게 표시해 둔 설치물이 눈에 띈다. 맞다. 신규 임용 공무원. 그게 바로 나다. 물론 곧 마흔 노땅 신입이긴 하지만, 그런 게 뭐 대수인가. 내가 공무원 된 게 대수지.
"어디 보자, 3층이면... 엘베가 어딨나..?"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역시나 나처럼 새까만 정장을 입고 주변을 어슬렁 거리는 딱 봐도 나 신입이요 티가 철철 흐르는 남자가 보인다. 그 남자가 가는 곳을 뒤따라간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배운 노하우 중 하나는 조직 생활에서 나대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이다. 그저, 잘 모르면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을 따라만 해도 중간은 간다는 걸, 나는 그 망할 전 직장에서 잘 배워왔다.
"역시."
나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주는 젊은 남자를 따라가니 대강당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와!"
눈앞에 강당 위 쪽에 큼직 막한 글자로 <신규 임용 공무원 오리엔테이션>이 적혀있는 큰 현수막이 보인다. 급이 다르다. 이전 직장은 종무식, 시무식도 이런 강당, 아니 강당이 다 뭐야? 아예 그런 공간도 없어서 사무실 책상 없는 가운데 동그랗게 서서 했었는데.
'역시 공무원이 최고다.'
공무원이 최고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속은 들떠서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강당 위 올라가서 "맞아!!! 내가 바로 이 신규 공무원이야!!!"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신입의 체면이 있지. 그저 안 그런 척 조용히 넥타이를 왼쪽 손으로 한번 매만지고는, 제일 앞자리에 앉는다. 나대고 싶진 않지만, 내심 관종인 나는 앞자리에 앉으면 그래도 시장님이랑 악수라도 한번 할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아, 이 관종끼가 공무원 생활에 도움이 될 거 같진 않은데...'
당장이라도 상하좌우위아래옆뒤로 나댈 것만 같은 심장을 꾸역꾸역 억눌러 참아보며 자리에 앉는다. 딱 봐도 공무원인 티가 팍팍 나는 검정 스커트의 여성 공무원의 사회로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된다. 맨 앞에 앉아서 그런가 진행요원들로 보이는 공무원들이 눈앞에 잘 보이는데, 그들 사이가 꽤 친해 보인다. 전 직장과는 비교가 안되게 친근해 보이고, 프리해 보인달까? 공무원이라고 하면 사기업보다 정 적일 거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편견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좋다. 너무 좋아! 다 너무 좋다!
흥분 때문인지 볼이 살짝 발그레진 것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본다. 하나 둘 자리를 채우더니 그 큰 강당에 까만 정장들이 속속 자리를 채웠다. 이번 내 동기들은 59명이라고 한다. 경쟁률은 무려 300대 1이었다고.
맞다. 무려 299명을 제쳐내고 무려 이 멋진 공무원이 돼서 이렇게 멋진 강당에서 이렇게 죽여주는 오리엔테이션 자리에 앉아있는 내가 바로 그 공무원이다. 하하하. 기분이 너무 좋다. 옆에 앉아있는 동기 여러분을 보니, 나처럼 흥분한 상태인지 볼들이 빨개 보인다. 좋겠지. 첫 직장이 공무원이면 얼마나 좋겠어? 좋을 때야 암.
동기가 50명이나 있다는 것도 너무 좋다. 전 직장은 비 상시 채용이었어서 달랑 나 혼자였다. 회사에는 회장, 사장, 전무, 상무, 이사, 팀장, 차장, 과장, 대리뿐, 동기는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도 그저 혼자 꾸역꾸역 삼키는 게 전부였다. 미생에서 봤던 동기들 간 으쌰으쌰 하는 모습이 회사생활에서 당연한 건 줄 알았던 나는 대 실망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망할 회사. 때려치길 백번 잘했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제 공무원이다. 무려 50명이 넘는 동기와 함께하는 귀여운 신입 공무원. 너무 좋다. 그렇게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었다. 안타깝지만 시장님과 직접 악수를 할 순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뭐, 내 능력이면 언젠가는 시장님이랑 호형호제... 는 오바고, 악수는 언제가 할 날이 오겠지.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잠시 대기해 달라는 사회자 분의 말을 끝으로 공무원이 된 내가 아직도 실감이 잘 안나 멍하니 강당 위 현수막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 주사님! 주 주사님!"
주주사? 발음도 뭔가 이상한 주 주사라는 단어가 내 귀에 닿았다. 무슨 말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강당 뒤쪽에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는 캐주얼 복장의 사람들 무리가 보인다. 목에 공무원 증을 걸고 있는 걸로 보아 시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인가 싶다. 다들 김 주사님! 고 주사님! 하 주사님! 장 주사님! 뭐 이렇게 불러대더니, 동기 공무원들이 하나 둘 그들을 따라 나간다. 주사란 게 뭔가 사기업에서 차장, 과장, 대리처럼 직급을 부르는 호칭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주 주사는, 나를 부르는 게 분명하다. 주 씨는 흔하지 않으니까.
"저기.. 제가 주 씨 이긴 한데.. 혹시.."
멋진 신규 공무원인 나는 주눅 들지 않고 먼저 주 주사를 애타게 찾는 공무원에게 말을 건다.
"아! 이쪽으로 오세요. 바로 저희 과로 내려가실게요!"
음.. 분명 선배 공무원일 텐데 나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여성 공무원이 따라오라며 나를 데려간다. 아, 너무너무 설렌다. 전 직장에서는 이런 게 없었단 말이지. 신입 때만 누릴 수 있는 이 멜랑꼴랑 오묘 무시한 긴장감! 너무 좋다!
나는 그녀를 따라 2층 OO과가 적혀있는 사무실로 들어간다. 음. 작다. 내가 일했던 그곳보다 사무실도 작고, 책상도 작고, 의자도 작아 보인다. 당연히 있어야 할 책상 좌우 앞을 막아주는 파티션도 없다. 따닥따닥 붙어있는 공간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촌스럽다.'
서울 삐까번쩍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빌딩 10층에서 근무하던 전 직장 사무실과 비교했을 때, 딱 이 네 글자가 머리에 스친다. 거기다..
'저 태극기는 뭐야? 일제 시대인줄.'
벽 한가운데에 태극기가 다 낡아빠진 나무 액자틀에 간신히 매달려있다. 이런 사무실에서 일하는 건가? 사무실 안쪽 앉아있는 선배 공무원들을 본다. 누군가는 신나 보이고, 누군가는 병든 닭 같다. 내 이전 직장의 모습처럼. 직장인들 삶 다 똑같긴 하겠지만, 그래도 공무원인데. 훨 좋을 텐데 왜 저렇게 맥이 빠져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나는 신나게 일해야지. 공무원이 최곤데 다들 왜 저럴까. 참.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이쪽이 저희 과 과장님이세요. 과장님, 이 분이 오늘 새로 발령받으신 주 주사..."
날 인도했던 선배 공무원이 다부진 체구를 가진 흰머리 지긋한 어르신 앞에 날 세워두고 빠르게 사라진다. 눈으로 그녀를 쫓는 내 귀에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하하- 반가워요! 잘생기셨네! 그래, 나이가 좀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 회사라도 다니다 온 건가?"
깜짝 놀랐다. 호탕해도 이렇게 호탕할 수 있다니. 얼굴에 광채가 절절 흐른다. 그렇지. 공무원 생활 몇십 년 하면 이렇게 호탕해지는 거겠지. 전 직장에서 모셨던 늘 구부정한 채 멍한 눈동자만 꿈뻑이던 할머니 팀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과장이라는 그의 호탕한 웃음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기분이다.
"아, 네 과장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결국 어젯밤부터 간신히 눌렀던 들뜬 내 심장이 사무실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말을 한다.
'하하!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공무원이 되고 싶었는데. 역시 너무 좋다! 역시 공무원! 역시 갓무원! 역시 킹무원!! 최고다!!!‘
심장이 계속해서 쿵쾅쿵쾅 나대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이 좋은 공무원을 왜들 그렇게 때려치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