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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양c Feb 15. 2024

Ep10.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염라가 잠시 예랑의 등에서 손을 떼며 예랑의 얼굴을 살핀다. 결국 아빠와 엄마가 소멸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받고 만 예랑의 눈동자가 텅 비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는 염라는 어색한 듯 자리에서 일어선다.


“흠흠... 이 라디오가 그건가? 이번에 <해주신>님이 천국에 인간계의 라디오를 항상 켜두라고 했다더니... 아무튼 특이하신 분이라니까. 삼신도 모시기 참 힘들겠어 쯧쯧.”


염라가 손가락 하나를 펼쳐 라디오에 새까만 바람을 불어넣어 본다. <해주신>의 권능이 담겨서인지 염라의 바람에 아무런 타격이 없는 듯 인간계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염라님... 주랑이는요...?”

예랑이 다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숨결에 섞어 말을 내뱉는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도 받은 듯 염라가 애써 대답하기 시작한다.


“아, 그... 너랑 같이 있던 악마 아이 말하는 거지? 그 아이는 일단 다시 헬게이트를 통해 지옥으로 돌려보내졌어. 아마도... 위대한 세 신의 재판을 받기 전까지 그곳에서 대기하게 될 거야. 아, 너는 모르겠구나. 네가 의식을 잃은 동안 이번에 벌어진 일로 인해 헬게이트는 다시 굳게 잠겼단다. 천사의 수를 늘리려는 계획은 즉각 폐기되었어. 천국에 있던 몇 없던 아기 악마들도 모두 헬게이트 너머로 보내져 그 주랑이라는 아이와 마찬가지로 판결을 기다리게 되겠지. 비록 그들의 부모 천사는 너의 아빠처럼 폭주하진 않았다만... 어쨌든, 천사가 소멸한 것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 말이야.”

여기까지 말한 염라가 잠시 숨을 고른다. 마치 다음 이야기를 할지 말지 고민하는 듯하다. 그런 염라를 예랑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없으니, 아무 이야기나 해달라는 듯한 눈빛으로.


“음...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다만, 아마도 그 주랑이란 악마 아이로 인해, 너의 아빠가 서서히 지옥의 악에 물들어간 것 같아. 왜 유독 너의 아빠만 그렇게 쉽게 악마의, 그것도 아직 어린 악마의 매혹에 물들여졌는지 나는 모르겠다만, 그 주랑이란 아이가 너의 아빠의 다 타버린 천사의 고리를 잡아낸 걸 보면 너의 아빠는 지옥의 악에 물든 게 분명하긴 하거든. 삼신의 빛에 타격이 없었는데, 내 가벼운 지옥 바람에 무너진 것도 그렇고 말야.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주랑이라는 악마를 너무 미워하진 않았으면 해. 그 악마가 일부러 너의 아빠를 지옥의 악으로 물들인 것 같진 않아 보이거든. 지옥의 악마는 숙명적으로 주변의 다른 존재를 자신과 같은 지옥의 악마로 물들이는 존재들이야. 다만, 그것이 인간이 아닌 천사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을 뿐이었지. 아마도 너의 아빠인 천사도, 악마인 주랑 자신도, 삼신도, 그리고 나도. 위대한 세 신님들은 모르겠다만...

이번 경우처럼 악마와 천사가 같이 자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헬게이트를 열 당시, 천사의 빛이라면 아무리 지옥 태생의 악마여도 그 빛으로 품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거든. 지금에 와서야 보면 오만한 확신이었지만...

뭐, 이 모든 건 내 추측일 뿐, 정확한 건 위대한 세 신님의 판결이 나와봐야 정확해지겠지만...”


분명 자신을 보고 있지만 자신 너머의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한 멍한 예랑의 눈길에 염라가 당황한 듯 말을 잇는다.


“아,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주랑이란 악마가 헬게이트 너머로 강제로 끌려가면서도 예랑이 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는 거야. 그러니, 절대 일부로 너의 아빠를 그렇게 한 건 아닌걸 거야. 이건 내가 장담해. 지옥 어떤 악마도, 나 염라를 속일 순 없거든. 크크.”

염라가 특유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예랑의 눈치를 살핀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염라와 예랑은 대화를 이어갔다.

예랑은 물었고,

염라는 답했다.

그들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그들은 인간계의 존재들과 달리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으므로.


그리고 왜인지 삼신은 예랑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염라의 말로는 이번 일로 인간계에 유성우와 거대한 눈발이 쏟아지는 등의 이상징후가 생겨 삼신이 인간계에 내려가 수습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했다. 예랑은 그런가 보다 했다. 삼신을 원망하는 게 맞는지, 감사해야 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예랑의 머릿속은 뒤죽박죽 혼돈 그 자체였다. 믿었던 아빠가 똑같이 믿었던 엄마를 공격해 소멸시켜 버렸다. 아빠를 물들였다는 악마인 주랑이 예랑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인간계 인간들만큼이나 천국 천사를 아낀다 믿었던,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를 그렇게 자주 만났던 삼신이 아빠를 소멸시켜 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내팽개친 채 나타나질 않는다. 이에 반해 지옥의 악이라 믿었던 염라가 자신을 치료해 주며, 왜인지 따뜻하게 자신을 위로해주고 있다. 자신은 천사인데, 마지막 빛의 가루로 흩날려 소멸해 버린 엄마의 미소가 떠오를 때마다 그 어떤 악마보다 더 악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예랑의 온몸과 머리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천사인지, 악마인지, 아빠가 선인지 악인지, 주랑이 악인지, 염라가 악인지, 삼신이 선인지. 이 모든 걸 예상했는지 몰랐는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위대한 세 신마저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혼자 남은 예랑은 원망과 감사의 혼돈 속에 파묻혀버렸다.  

   

<단 한번 축복, 그 짧은 마주침이 지나 빗물처럼 너는 울었다. 한 번쯤은 행복하고 싶었던 바람, 너까지 울게 만들었을까. 모두 잊고 살아가라, 내가 널 찾을 테니. 니 숨결 다시 나를 부를 때 잊지 않겠다. 너를 지켜보고 설레고 우습게 질투도 했던 니가 준 모든 순간들을, 언젠가 만날 우리 가장 행복할 그 날. 첫눈처럼 내가 가겠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예랑의 귀에 라디오라 불린 작은 상자에서 인간의 구슬픈 노랫소리가 들린다. 첫눈처럼 가겠다는 말이 들려서인지 창밖 너머 슬픔 나무 숲 위 하얀빛의 가루들이 구슬프게 흩날리는 것만 같다. 이제 아빠도 없는데 왜 숲에 빛의 가루가 날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쳐다보고만 있을 뿐인데도 아빠와 엄마, 그리고 주랑의 생각이 나서인지 예랑의 눈에서 빛의 방울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런 예랑을 물끄러미 보던 염라는 라디오 옆에 서 괜히 라디오 주변을 정리한다.


‘툭’

라디오 옆에 꽂아둔 신문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예랑의 눈이 반사적으로 신문을 쫓는다. 그 신문에는 은빛 단발의 삼신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박혀있다.


마치 본인이 다 알아서 하겠다는 듯한,

하나도 당황하지 않는

특유의 은은한 미소를 띤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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