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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현 Feb 22. 2024

Ep11. 천국과 지옥의 병원




<다시 3천 년 후 삼신 전문 병원>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예랑은 <천사폰>에 뜬 삼신의 사진을 마주하고 있자니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가슴속 서늘함이 번뜩이는 것 같다. 언제부터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 예랑의 입술이 짓이겨진 채 입술 안으로 간신히 빛이 흐르고 있다.


“후.”

예랑이 깊은 심호흡으로 몸속 빛의 흐름을 원활히 정돈해 본다.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예꼬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알지도 못하는 병마와 싸우느라 빛의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간신히 이어지는 아이의 숨소리에 당장이라도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다. 그런 예꼬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어린 시절 자신의 상처 때문인지 예랑은 그렇게 연거푸 숨을 몰아 쉰다.


‘헬게이트를 여시겠다고? 그때 그 끔찍한 사건은, 결국... 개인의 몫이라 이거지?’

그때 천사의 소멸이라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한 천사 가족이 그렇게 풍비박살이 났는데도 위대하다는 세 신은 다시 한번 똑같이 헬게이트를 열려고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에 예랑은 치가 떨린다. 그때의 고통, 그때의 상처, 그때의 눈물이 자신은 아직 진행 중인데, 윗분들에겐 그저 철 지난 사건에 지나지 않나보다하는 생각에 여기가 천국인지, 지옥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그 어린 시절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헷갈렸던 그때처럼.


‘그때도 지금도, 이 세상은 정말 하나도 나아진 게 없다. 그저, 내가 나아졌다고 믿고 싶었을 뿐이었던 건가...’

예랑이 입술을 굳게 다문다. 더 이상의 한숨도 낭비라는 것처럼.

<천사폰>에 떠있는 헬게이트라는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 글자에서 문득 어린 그때, 마지막으로 봤던 주랑의 웃음이 머릿속에 스쳐간다.


‘그게... 그 교활한 웃음이... 슬퍼서였다고...? 그게 악마가 슬퍼하는 방식이라고...?’

예랑은 어린 그때 염라에게 치료받으면서 악마는 슬플 때 웃고, 기쁠 때 운다는 걸 수없이 들어 머리로는 이해했음에도, 마음은 여전히 주랑의 웃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악마 놈들... 위대한 세 신은 무슨 생각으로 악마를, 지옥을 그대로 두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백해무익한 것들... 쯧. 이 병도 분명 지옥에서 시작됐을 거야. 도대체 어떻게 천국으로 흘러들어온 건지...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는 건 위대한 세 신과 염라, 그리고 삼신 정도일 텐데... 그들 중 누구도 천국, 지옥, 인간계의 균형이 깨지는 걸 원하지 않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콜록. 콜록. 컹컹.”

예랑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푸석푸석한 긴 금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천사 하나가 개가 짖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기침을 해댄다. 그 기침 소리를 들은 예랑은 어린 시절 아빠가 언젠가부터 해대던 기침 소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그 생각이 아빠의 마지막 새까만 눈동자의 모습을 끌고 온다. 그때의 끔찍한 기억을 떨치려 예랑은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누구보다 믿었던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끔찍하다는 건 정말 최악이란 생각이 다시 한번 예랑을 괴롭힌다.


“컥컥. 컹컹.”

금빛 머리카락 천사의 기침소리가 점점 거세진다. 저러다 당장이라도 새빨간 빛을 토해낼 것 같은 걱정이 든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직까지 자신은 그 망할 병에 걸리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 감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선한 마음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걸 보니 천사는 천사가 맞는 것 같다.


‘다행이지... 나도 저렇게 병에 걸리면, 당장 우리 예꼬를 누가 돌볼까... 그런 대책은 있나, 이 천국에? 아니, 이 병을 치료할 방법이나 있나? 결국 끝없이 빛을 주입하고 주입하는 방법뿐이면... 지금처럼 빛이 모자라다 떠들어대는 천국이라면... 최악인 거 아닌가?’

마음이 답답해진 예랑이 다시 고개를 들어 천장 스크린 화면을 올려다본다.


<10>


예랑의 순번이 드디어 한 자릿수에 진입하기 직전이다. 그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 건지, 화가 나야 하는 건지 이젠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 예꼬를 왜 인기가 많은지 모르겠는 잘난 1번 의사 천사에게 진찰을 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화면에서 눈을 떼 주변을 둘러본다. 분명 순번이 많이 줄었음에도, 여전히 삼신 전문 병원 안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몸을 구부린 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인간들도 자신들을 고치기 위한 의사가 있는데, 우리는 왜 이모양인거지...’

끝없는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 같은 천사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이 병원만 해도 애초에 천사들을 위한 병원도 아니고...’

그랬다. 예랑이 있는 병원은 애초 천사들이 아닌 신들을 위한 병원이었다. 신들을 위한 병원이란 게 필요할리 만무했지만, 신들의 대전쟁 당시 천국과 악마의 수많은 신들이 서로를 공격해 대자 치료가 필요해졌고, 위대한 세 신은 최소한의 치료를 위해 삼신과 염라에게 지시, 천국에는 삼신 전문 병원을, 지옥에는 염라 전문 병원을 설립했다. 그렇게 신들의 대전쟁 후 신들이 일순간 사라지자, 그 후 천사와 악마들을 위한 병원으로 바꿔 사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천사들을 위한 치료다운 치료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저 빛을 더 주입해서 증상을 완화시키고, 소멸을 막을 뿐이었다.


‘지옥에는 여전히 염라 전문 병원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마지막으로 염라를 봤던 게 언젠지...’


예랑은 왜인지 삼신보다 자신을 아껴줬던 염라가 문득 생각난다.

염라는 그때 그 사건 이후 아빠와 엄마의 뒤를 이어 슬픔 나무의 숲을 복구하는 것을 도와주고, 예랑 자신이 나무들을 돌보는 것에 익숙지 않았을 때 늘 옆에서 나무를 관리하는 방법을 알려줬었다. 왜 삼신이 아닌, 염라가 자신의 옆에 붙어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삼신에 대한 예랑의 기억 중 좋은 기억은 딱히 없었으므로.


그렇게 슬픔 나무의 숲을 일부 복구하고, 그 이름도 슬픔 나무의 정원으로 바꾼 것도 염라였다. 정원에 올 때 가끔씩 염라는 지옥의 이야기를 예랑에게 들려주곤 했다. 아마도 지옥에 원한이 넘치도록 흐르는 천사인 자신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함이었겠지만, 지옥의 이야기를 듣는 게 영 불편했던 예랑은 그저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건, 지옥의 악마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점이 자신이 있는 천국 천사들과 가장 다른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사들은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 끝도 없는 형식과 절차에 얽매여, 빠르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아기 천사가 아픈데도 끝도 없이 대기 순번을 기다리는 지금처럼 말이다.

하지만 염라가 들려준 지옥은 달랐다. 그들은 필요하면 인간 수십수백을 삽시간에 꼬셔 그들로부터 악을, 피를 빼내 즉각 악마 자신의 병을 치료한다. 죄책감은 없었다. 자신들이 살면 그만이므로. 그깟 악한 인간들은 사라져도, 또 끝도 없이 악해지는 인간들이 넘치고 넘치니까. 그것이 악마이고, 악마인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했다.


‘뭐랬더라... 당장 내가 죽겠는데, 수단방법 안 가리고 살고 봐야지라던가...’

지옥 이야기에 무관심했던 예랑이었음에도, 염라가 혼잣말인 듯 내뱉은 말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뭐 그런 것들이 있나, 이기적이고 악하고 사악하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예꼬가 아프고, 수많은 천사들이 꼬꾸라진 채 병원에 저러고 널려있는 모습을 보니, 수단방법 안 가리고 살고 말겠다는 악마들의 생각이 필요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이 든 자신을 깨달은 예랑이 내심 깜짝 놀란다.

다른 천사들은 그런 예랑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다행히 예랑의 머리 위 천사의 고리의 색은 여전히 하얀색을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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