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뻔한 그 신파에 침몰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나왔어 아빠..“
굳게 눈을 감고 다 헝클어진 머리를 어쩌지 못한 아빠를 향해 호랑이 넌지시 말을 건네본다.
호랑의 머릿속 누군가는 마음 한편에 자신의 목소리로 아빠의 저 무거워 보이는 눈꺼풀이 조금이라도 열리지 않을까,
아니,
감동적이지만, 어쩌면 뻔한 신파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부르르 떨며 눈물이라도 한 방울 세워 나오지 않을까 하는 쓸쓸한 설렘의 눈길을 던진다.
하지만 역시나 현실은 현실일 뿐이었다.
기분 나쁘게 삑삑 대는 생명유지장치들만이, 아빠가 호랑의 자신의 곁에 없음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호랑은 그 삑삑 대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서 가방 앞주머니에 있는 치열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선으로 둘러싸인 이어폰을 끄집어내 차분한 손길로 헝클어진 선을 푼다. 마침내 발견한 이어폰의 머리 부분을 자신의 귀에 지금까지의 손놀림과 다르게 거칠게 꽂는다. MP3의 끝에 풀어진 이어폰 꼬리를 꽂는다. 무심한 손가락이 옆으로 누인 세모를 꾸욱 한번 누르자, 오전에 흘러나오던 신청곡이 이어폰의 꼬리를 시작으로, 길어진 선을 따라 호랑의 귀로 가느다란 선율을 전해온다. 마침내 삑삑 대는 생명유지장치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이어폰 선이 두꺼웠으면 어쩌면 더 묵직한 소리가 나지 않을까?”
머릿속 100개의 목소리 중 하나가 말한다.
“넌 그게 문제야. 진짜 쓸데없는 생각. 그리고 뭐? 않을까? 넌 그것도 문제야. 늘 부정적인 질문으로 끝나지. 니 인생도 뻔하겠다. 안 그래?”
다른 목소리가 거칠게 파고든다.
“너도 안 그래라고 물어보네. 똑같네. 그치?”
호랑이 두 목소리를 지그시 누르며 혼잣말을 속삭인다.
귀는 길을 찾았는데, 눈은 길을 잃고 주변을 둘러본다. 주변엔 온통 아빠 밖에 없다.
본인이 환자라는 걸 그렇게 뽐내고 싶었는지 머리는 잔뜩 떡지고 헝클어져있다. 호랑이 물티슈를 집어 들고 아빠의 이마에 가져다 댄다. 앞머리 뿌리 쪽이 새하얗다. 새하얀 뿌리에 호랑은 사뭇 놀란다.
세월이라는 하얀 가루가 아빠를 잡아먹고 있다. 병원의 순백과 같은 하얀색.
하얀색이 싫어진다.
굳게 닫힌 눈꺼풀로 물티슈를 옮긴다.
코 아래에는 수염이 자라났다.
어릴 적 잘 자고 있는 자신의 볼에 늘 비벼대던 수염. 아빠는 왜 그렇게 볼에 자신의 수염을 비벼댔을까. 그때는 잠에서 깨운 아빠를 원망만 했는데, 이렇게 수염을 닦고 있노라니, 나중에 꼭 그것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귓속 노래가 끊긴다.
헤이 디제이를 찾던 노래가 멈추고, 힘겨운 날들을 견뎌왔음에 감사하다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편지..?”
뭔가 절절한 노래다. 남자가 여자에게 쓴 편지. 뭐 그런 내용인 것 같다.
뻔한 신파.
세상은 뻔한 신파로 둘러싸여 있다.
사람들은 뻔한 그 신파에 침몰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호랑은 자신이 아빠를 닦고 있는 이 행위도 뻔한 신파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귓속 울어대는 노래와 달리, 이 뻔한 신파를 듣는 사람도 보는 관객도 없다는 게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신파의 상대도 모르는 신파. 오직 호랑만 아는 신파의 순간.
‘삶은 왜 이렇게 쓸쓸한가.’
머릿속 누군가가 호랑에게 물어온다.
익숙한듯 전혀 익숙하지 않은 물음.
그 물음에 귓속에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노랫말이 답하듯 울려 퍼진다.
‘타이밍 좋네.’
호랑은 머릿속 누군가에게 한방 먹인 것 같아 바람에 잠시 위로 떠오른 바닥 벚꽃잎처럼 살며시 기분이 들뜬다.
아빠의 손가락을 물티슈로 닦는다.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 끝부분에 작은 상처가 있다.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상처. 그 상처가 식당에서 소주 한잔 하다가 컵이 깨져있어서 살짝 베었다는 아빠의 말이 떠오르게 한다. 호랑은 그 순간을 알고 있었다.
그날도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흔한 고등학생의 저녁. 학교를 마치고 학원에 가 졸린 눈 비비며, 어떤 목적인지,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를 멍한 눈으로 초록색 칠판 보기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
<작은 해장국>
다 꺼져가는 흐릿한 간판이 빛을 간신히 이어가는 그런 흔해빠진, 너무 낡아빠진 가게가 그곳에 있었다.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