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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양c May 23. 2022

Ep17. 뭘 위한 기다림이었을까

그만 좀 기다리라고 해 제발



"야야 그래도 이미 너 싫다고.. 아니 아니지 그 회사 싫다고 떠난 그 오 차장이란 사람 꽤 괜찮은 거 같은데? 회사 떠나면 어쩌면 평생 안 봐도 그만인 사이일 수도 있는데 그래도 거기 남은 너 신경 써준다고 이직 제안도 하고, 이력서까지 달라하고. 요즘 세상에 그렇게 챙겨주는 사람 찾기 힘들지 않아? 또 돈도 많이 벌게 해주는 회사라는데, 그냥 모른 척 이력서 바로 보냈어야지. 그걸 왜 망설였을지 난 노 이해다 정말~"

예소가 정말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는 듯이 아인에게 이야기하였다.


"음.. 그때 이력서를 보냈다면, 그래서 몸이 힘들어 갈려나갔을지라도 연봉이라도 많이 받아서 돈 많이 벌게 되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근데 그때의 난.. 음.. 분명 뭔가 잘못된 회사인데, 내가 옮기긴 싫고. 왜였을까 생각해보면.. 1. 이미 그곳에 너무 적응돼서 맨날 하는 일만 하고픈 흔한 직장인의 타성과 2.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조직, 새로운 사람들, 이런 새로운 것들에 대한 적응의 불편함. 모 그런 거 아니었을까? 결국 대부분의 이직러들이 고민하는 흔한 것들?"

아인이 말했다.


"대부분이 그렇긴 하지.. 너도 별 수 없는 거지 뭐..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오 차장한테 이력서는 보내본 거?

다음 이야기가 무척 궁금하다는 듯 예소가 말했다.


"잘 들어봐. 오 차장은 설 팀장의 본부장 자리 제안이 터무니없다고 단정 지었지만, 그때의 난.. 그래도 난 돈을 좇아 이직하는 것보단, 내 꿈을 그곳에서 실현시킬 수 있으면, 그 기회가 사실이라면 한번 밀고 나가보자고, CEO 제안을 믿어보자고 밀어붙이기로 결심했어. 그래도 설 팀장, 아니 이 회사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믿어보자 그랬던 거지. 그래서 다음날 설 팀장에게 선언했지."

아인은 말을 이어갔고, 그날의 급박했던 공허함이 다시 한번 느껴지는 것 같았다.



늘 그랬듯, 아침부터 설 팀장은 기분이 좋지 않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그냥.. 그 나이쯤 되면, 그 정도 직책쯤 되면 그래, 그냥 다 하기 싫어질 뿐.


"아니. 내가 그 망할 팀 소속도 아니고, 원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지들이 잘못해서 무려 팀장인 내가 서포트해주는 건데, 왜 이렇게 아침부터 빨리 해달라 재촉질이야.. 진짜”


설 팀장은 아침부터 짜증 섞인 불만을 토해냈다.

아무도 듣지 못할 거라 생각한 혼잣말인 것 같았지만, 우리는 안다.

본인은 이렇게나 중요하고, 바쁜 사람임을 끊임없이 어필하기 위한 모두가 들으라는 혼잣말이라는 것을.


'왜 인간은 귓구멍은 자기 의지로 여닫을 수 없게 만들어졌을까? 눈처럼 보기 싫으면 눈 딱 감을 수 있게, 귀도 듣기 싫으면 딱 닫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역시 직장생활에선 여러 가지 아쉬운 게 참 많다 생각하는 아인이었다.


'자 어떡한담..'


아인의 손에 들린 선택지는 세 가지로 정리되었다.

1. 퇴사 밀어붙이기: 그렇게 꿈꾸던 쉼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지옥 같은 이 회사를 떠날 수 있다. 단 월급이 당장 끊기게 되는 대책 없는 현실을 바로 맞닥뜨리게 된다.

2. 오 차장 추천 이직 찬스: 불어난 연봉이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단 새로운 조직 적응이 필요하고 수출회사의 과도한 업무량이 뻔하다.

3. 설 팀장의 CEO 제안: 업계 최연소 CEO타이틀과 높은 연봉, 원하는 조직 구성이 가능하다. 단 이 제안이 과연 회장도 알고 있는 회사의 공식적인 제안인지에 대한 함정이 있다.


'자.. 지금 내겐 이 세 가지 카드가 있다.. 참 근데 이것도 참 그렇다. 정말 회사를 생각한다면 지금 이런 선택지의 문제 안에서 허우적거릴 것이 아니라 성과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회사도, 내게도 서로 손해인 거 아닌가..'


본인의 삶과 회사의 이익 중 매번 회사를 우선시해온 아인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어쨌든 어떤 선택을 하던 본인의 삶의 궤도가 큼직하게 변경될 것이었으므로 아인은 최대한 신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 차장의 비웃음이 들리는 것 같지만, 그래도 CEO 제안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1,2번을 해도 늦지 않잖아.. 어쨌든 지금도 내가 팀 업무 거의 다 하고 있고, 그에 맞는 보상만 확실하다면, 굳이 1, 2번 먼저 저지르면서 이 회사를 나갈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설 팀장한테 CEO 제안이 진짜인지 한번 던져라도 보는 거지 뭐.'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아인의 눈이 순간 번쩍였고, 다리가, 몸이, 팔이, 이미 설 팀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팀장님.. 저 그때 말씀 주신 부분 고민해봤는데요, 제 결정 말씀드리려고요."


"어? 지금? 나 이거 오전 내로 해서 1팀 보내줘야 하는데.. 음.. 저기 회의실 들어가 있어. 이것만 하고 바로 갈 테니까"


회의실의 익숙한 적막.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설 팀장 등장.

드디어 마주 앉은 아인과 설 팀장.


"팀장님, 먼저 여쭙고 싶은 건.. 제 사직서는 회장님께도 보고가 된 건가요?"


"어? 아.. 그게.. 주 과장도 잘 알겠지만.. 회장님이 워낙 바쁘시고.. 주 과장 결정 듣고 보고 드리려고 해서 아직.."


"아직 보고도 안된 거군요..?’

원래 같았으면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올랐겠지만 아인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말을 이어갔다.

“음.. 팀장님, 그때 말씀 주신 새로운 화물본부 CEO 제가 맡아서 해보겠습니다. 사직서는 없던 걸로 해주시면 되겠네요."


"어? 어? 아 정말? 그래 그렇군.. 잘 생각했네.. 일단.. 그래 일단, 알았어. 좀 기다리고 있어 봐"


 망할 놈에 기다리라는 .

대체 언제까지, 뭘 위해서,

사표를 던져도, 회사에 남겠다고 해도,

도대체 뭘 위해 기다리란 말인가?


흔들리는 눈동자와 불안한 듯 뭉개지는 말투. 뭔가를 숨기고 있는 티가 여실한 설 팀장의 태도가 온전히 느껴졌지만, 그리고 오 차장의 비웃음이 계속해서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인은 눈 딱 감고 말을 이어갔다.

이번  , 아니 단 한 번만이라도 나를 믿자.’

이번에도 움츠러들면 먼 미래의 자기 자신에게 지금 이 순간이 미안함으로만 기억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너무 싫은 일이었다.


"팀장님, 한 가지 궁금한 게, CEO니까 당연히 연봉, 복지 등은 임원급에 맞춰 보장되는 거겠죠? 그리고 해당 팀은 해외영업 3팀이 아닌 완벽히 독립된 조직이고, 제가 직접 팀 멤버를 꾸릴 수 있게 회장님께 보고드릴 때 확실히 해주세요. 인력 보충 필요하고, 가능하면 제가 해당 인원 채용 직접 주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팀장님과 업무 분리가 완전히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이 요구사항들 임원회의에서 확실히 컨펌해주시는 조건으로 CEO직 수행하겠습니다. 혹시 필요하다면 제가 직접 회의 들어가서 설명드릴 테니 알려주세요.”


아인은 차분하게 본인이 구상한 본부의 조직 구성과 요청사항을 이어갔다.

글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얼마 전 사표를 낼 때만 해도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애쓰던 주 과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어느샌가 CEO에 걸맞은 차분함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조금 오버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저 뱀 같은 설 팀장은 또 본인 입맛대로 아인을 이용해 먹을 것이라는 쓴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그리고 그건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현실이었다.


"어? 하하.. 그래. 대단하네.. 아니 역시 주 과장이네. 거봐 잘할 수 있을 거라니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일단 회장님 최종 결정 날 때까지는 함구하고 기다리고 있어. 최대한 빨리 결정되는 대로 다시 알려줄 테니.."


이렇게 까지 구체적으로 CEO직에 대한 요구사항을 제시할 것을 예상 못했던 것이었을까? 설 팀장의 당황스러운 낯빛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아인은 그 창백한 얼음장 같은 낯빛을 확실히 부수겠다는 듯 한마디 덧 붙였다.  

어쨌든 CEO가 된다면 설 팀장을 아랫사람으로 부려야 하는 건 나니까.


"CEO직 언급하실 때 분명 회사 임원분들도 다 알고 계신 것이라 하셨습니다. 최대한 빨리라는 어중간한 대답 말고, 언제까지 확답 주겠다고 기한을 정해주세요. 저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아~ 이 사람. 빡빡하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나? 나도 빨리 결정해주고 싶지. 근데 자네도 요새 회사 사정 알지 않나.. 회장님 스케줄도 맞춰봐야 하고. 그러니까.. 좀 기다려."

회의실 문을 쾅 닫고 나간 설 팀장의 차가운 공기만 회의실에 남았다.


'저 망할 회사 사정.. 저 망할 기다리라는 말.

그만  기다리라고 해 제발.

흐음..

그래도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것 같긴 한데.. 잘했어 주아인! 회사에 말해야 할 건, 말하는 게 맞는 거야 움츠러들게 아니라. 그게 맞아’


회의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아인.

어두운 회의실과 대비되는 통유리 창으로 비추는 밝은 햇살, 그리고 더 밝게 빛을 반사하고 있는 높은 빌딩 창들. 그 틈바구니 아인이 앉아있는 공간만 그 빛이 피해 간 듯 급박했던 공허함만 남아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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