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노르웨이의 숲
작가 :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사 : 민음사
제일 큰 이유는 유명함 때문이다. 러닝으로도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빨리 읽고 싶었던 이유는 노르웨이의 숲의 플레이리스트 때문이다. 유튜브로 책의 리뷰들을 몇 개 봐서 그런지 요즘 알고리즘에 책에 관련된 콘텐츠가 굉장히 많이 뜬다. 그러다가 ‘책읽기일기’ 라는 유튜버가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노래들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가사 없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오로지 이 책만을 위한 플레이리스트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빨리 음악과 함께 읽고 싶었다.
“자신을 동정하지 마. 자신을 동정하는 건 저속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469p
나는 불안과 고통 속에서만 보냈던 고등학교 시절의 나 그리고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던 대학교 1학년 때의 나를 동정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자주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동정한다. 내가 불쌍해 보일 때가 있다. 텍스트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스스로를 동정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빠르게 우울의 수렁으로 빠지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스스로 동정을 아예 안 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뇌는 ‘합리화’를 하게 설계되어 있다. 내가 실수하거나 갑자기 슬픈 일이 닥쳤을 때 우리의 뇌는 합리화할 거리를 찾는다. 내가 이렇게 된 이유를 찾는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동정하게 된다. ‘이때는 이랬으니까, 힘들었으니까.’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런 합리화로 어느 정도 정신적인 안정을 찾는 것이 나쁜 것인가? 이 주제(스스로 동정 안 하기)에 대해 글을 몇 개 읽어 보았는데 거기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신을 동정하는 야생동물을 보지 못했다.
얼어 죽어 나무에서 떨어지는 작은 새조차도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
-D.H. 로런스(영국 작가, 13)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eo71ceo&logNo=220579154525&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kr%2F
이 말에 약간의 반대를 하자면 동물과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다르다는 것이다.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의식이 훨씬 큰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동물과 비교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나는 스스로를 동정하는 자기 연민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동정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내가 스스로 동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책했다. 스스로에게 화나기도 했다.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해서 스스로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들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다. 이것 또한 합리화이지만, 우리의 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으니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되는 것은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계속 자기 연민과 동정에 빠지면 안 되겠지만 지금껏 나처럼 스스로를 동정했다고 자책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내 생각에 스스로를 동정 안 하는 방법은 없다. 순간 내가 나를 동정하더라도 거기서 얼른 빠져나오려고 노력해야 할 뿐이다. 지금까지 찾아본 글 중에서 ‘스스로를 동정하지 말라.’라는 말은 엄청 많았지만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는 방법'은 없었다.
여기서 ‘나가사와'가 말하는 ‘저속한 인간'은 ‘스스로 동정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파괴시키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동정과 연민에서 빠져나올 생각조차 없는 사람들' 또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내가 어느 순간 나를 동정하고 있다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나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것이다. 매우 힘들겠지만.
세상에 상실(아픔)을 안 느끼는 사람은 없다.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누구나 트라우마, 아픔이 있다. 하지만 몇몇의 사람들은 아니,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다. 나는 여기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 물론 스스로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왜 자살하는 사람과 자살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뉠까? 아무리 정신적으로 아프다고 해도 끝까지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못 견디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런 것일까. 무슨 차이인 것일까. 선천적으로 고통을 못 견디고 ‘자신의 뒤틀린 부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만약 동일한 상황과 동일한 환경에서 똑같은 고통이 가해지는 상황이라면 결과는 같아질까? 아니면 조건이 모두 같더라도 자살하는 사람과 자살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뉠까. (모든 사람이 같은 환경에서 자라고 똑같은 영향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보 같은 상상이긴 하다.)
그는 우리가 여기에서 생활하는 것은 뒤틀림을 교정하려는 게 아니라 그 뒤틀림에 익숙해지기 위한 거라고 했어. 우리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그 뒤틀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다고. 사람마다 걷는 버릇이 다 다르듯이 느끼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 보는 방식이 다른데 그것을 고치려 한들 쉽게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고치려다가는 다른 부분마저 이상해져 버린다고 말이야. 물론 이건 아주 단순화한 설명이고, 그런 건 우리가 품은 문제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난 어쩐지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어. 우리는 분명 자신의 뒤틀린 부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그 뒤틀림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뇌를 자기 내면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여기 들어온 거야. 여기 있는 한 우리는 남을 아프게 하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아픔을 당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뒤틀림'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180p
분명 나오코는 환경이 좋았다. 상실이 컸더라도 현실에서 병을 고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에서 살았다고 생각한다. 규칙적인 생활과 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의 공감 그리고 자연.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갖춰진 제일 이상적인 정신병원이라고 생각한다.(그들은 정신병원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심지어 이곳의 사람들은 자신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제일 크다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가 정신적으로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나에게 뒤틀림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 나는 나오코의 병이 나아질 수 있는 최고의 환경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나아지지 않았을까. 그것이 너무 궁금하다. 의지할 수 있는 레이코도 있었고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와타나베도 있었다.
그리고 기즈키와 나오코의 언니는 왜 자살했을까. 책에서는 그들이 자살할 만한 이유가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특별히 고통을 잘 느끼거나 견디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뒤틀림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일까? 후에 ‘자살의 연구'의 독후감에서도 말하겠지만 똑똑한 사람들의 생각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우리에게도 아주 정상적인 부분이 있어. 그건 우리는 스스로 비정상이란 걸 안다는 거지. 298p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 속에서 성관계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읽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많고 자세해서 깜짝 놀랐다. “야동이 글로 쓰이면 이런 느낌이려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이다. 몇몇의 사람들은 배드신이 너무 자주 나와서 불편함을 느꼈다거나 못 읽겠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니.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좋았다. 나는 평소에도 ‘성'에 대해서 숨기려고만 하고 부끄러운 것이라고만 이야기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욕은 당연한 것이고 성관계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왜들 그렇게 감추려고 드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왜 더럽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더러운 행위였으면 우리 모두 다 태어나면 안 된다.
어쨌든 사람들이 기피하는 이런 베드신들을 넣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약간의 시원함도 있었고 작가의 솔직함으로 느껴져서 더 좋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베드신을 중요한 요소로 집어넣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기즈키가 죽고 나오코가 와타나베와 성관계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와타나베가 기즈키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잘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오코가 죽은 후 와타나베와 레이코가 성관계를 본능적으로 했다는 사실도 둘이 나오코를 제일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공감했다는 것을 성관계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난 지금 너와 섹스를 한다. 내가 네 안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이건 정말 아무 일도 아니다.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이건 몸을 나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불완전한 몸을 결합함으로써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따름이다. 이럼으로써 우리는 서로의 불완전성을 나누어 갖는 것이라고. 267p
이 말에 나는 뼈를 맞았다. 너무 아팠다. 나는 지금까지 노력이 아니라 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저 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서 노동을 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지금 국악과에 있을 이유가 없다. 악기를 할 의지도 없고 실력도 없다. 단지 4년제 대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서 바쁘게 노동만 하고 있었다. 심지어 졸업장을 따지 않으면 이상해지는 주변의 시선, 부모님의 바람, 사회적 불안 때문에 따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내 삶에는 주체적으로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없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 정도가 노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지금의 나에게 부끄럽다. 앞으로 노력을 해야겠다. (나는 지금까지 노력한 게 아니라 노동을 했을 뿐이다. 그냥 바빴지 노력한 것은 없다. 그저 열심히 산 것과 노력한 것은 다르다. 책 속 나의 메모) 책을 읽으면서 나가사와 같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자 친구가 있으면서 다른 여자들과 자고 다니는 건 빼고.
“자기가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 어떤 아픔을 느낀다면, 그 아픔을 남은 인생 동안 계속 느끼도록 해. 그리고 만약 배울 게 있다면 거기서 뭔가를 배우도록 하고. 하지만 그와 별개로 미도리와 둘이서 행복을 찾도록 해. 와타나베의 아픔은 미도리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잖아. 그 사람한테 더 상처를 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 거야. 그러니 괴롭겠지만 더 강해져. 더 성장해서 어른이 되는 거야. 나는 네게 이 말을 해 주려고 그곳을 나와 일부러 여기까지 왔어. 먼 여정을 관 같은 기차를 타고 말이야.” 556p
작가가 젊은이들에게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스토리를 끌고 온 것이 아닐까. ‘누구나‘상실'이라는 감정을 가지게 된다. 누구에게나 그런 상황은 온다. 상실은 사실 극복할 수 없다. 적응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하고 얻을 것은 얻지만 그 감정에만 빠지지 말고 현재를 살아라.’라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사람을 통해서, 관계와의 책임과 사랑을 통해서 상실의 아픔을 묻어 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결코 혼자 살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이 사랑해야지만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53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