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자살의 연구
작가 : 앨 앨버레즈 / 최승자, 황은주 옮김
출판사 : 을유문화사
사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었지만 나는 우울에 빠져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자해를 했었고(레슨을 할 때면 손톱으로 피가 나기 직전까지 피부를 눌렀다. 선생님께 혼나지 않아도 레슨만 하면 항상 그랬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행위가 자해라는 것을 알았다.) 차를 보면 사고가 나서 어쩔 수 없이 입시를 보지 못하게 됐으면(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루도 빠짐없이 한 시기가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자살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지만 항상 궁금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왜 사람들은 자살을 하는 것일까.’, ‘내가 자살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살을 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등 내가 자살을 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그래서 자살의 역사, 연구를 찾아보고 싶어 졌고 제목만 보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나는 매번 유명한 예술가들이 일찍 생을 마감한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왜 천재들은 자살하거나 일찍 죽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예술가가 훨씬 예민하기 때문에 그렇다고도 말하고 예술을 통해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될 때 그 앎이 예술가를 변형시켜 버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예술가는 자연을 향해 거울을 쳐듦으로써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되지만, 그 앎이 예술가를 영영 변형시켜 버릴 수도 있다. 80p
조금은 부끄럽지만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예술가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 논리가 맞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매우 예민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미세한 미분음을 알아차리는 동시에 박자를 세고 표현을 하고 음색을 신경 써야 하며 악보도 외우고 있어야 하고 나만의 스타일도 곁들여야 한다. 만약 합주라면 내 음악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음악에도 귀 기울이느라 더 예민해져야 한다. 평소에도 이 예민함을 장착하고 살다 보니 고통을 훨씬 더 크게 느끼고 사람들의 반응을 날카롭게 받아들인다. 그 사람의 의도를 뛰어넘어서 과하게 해석할 때도 있다. 가끔은 이런 예민함 때문에 나 자신을 과하게 생각할 때가 생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심연이나 죽음까지도 예술로 승화시킨다고 하지만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마주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무섭다.
예술가의 창조 행위가 반드시 그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 즉 예술가가 자신의 환상을 표현한다고 해서 그 환상으로부터 자동적으로 해방되는 건 아니다. 창조라는 행위에 내재한 어떤 기이한 논리에 따르면, ‘형식을 빌려 표현하기'라는 방법론은 예술가가 저 심연에서 끌어올린 소재들에서 벗어나기는커녕 거기에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도와주는 장치일 수 있다. 80p
최근 ‘신화와 철학'이라는 수업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 ‘창조의 에너지는 혼돈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말로 많은 것들이 정리되었다. 이 문제까지도 이제 이해가 조금은 된다. 몇몇의 사람들은 예민하기 때문에 고통을 더 잘 느끼고 혼돈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 혼돈에서 얻은 에너지를 예술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다.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지독한 사기이다.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그 끔찍한 거짓 쾌활함과 친절과 평안, 가족 간의 즐거움을 외치는 떠들썩한 소리들이 외로움과 우울을 더욱 견디기 힘들게 만든다. 68p
이 사실을 알고 내가 왜 봄에 더 힘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은 아직 꽁꽁 언 겨울 같은데 밖은 따뜻해졌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는 모습들이 보기 싫었다. 그래서 겨울을 좋아하기도 했다. 내 마음의 온도가 비슷한 것 같아서.
자연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더욱 온화 에지며 더 유쾌해질수록 그 내부의 겨울은 그만큼 더 깊어 가고,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은 그만큼 더 넓어지고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어 가는 것 같다. 따라서 자살은 부자연스러운 상태에 대한 자연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151p
내가 알바를 하고 있을 때 밖이 소란스러웠다. 바로 자살시도(투신)를 하려는 사람 때문에 도로가 마비되고 소방차가 오고 사람들이 구경을 하느라 소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 사태는 3시간 동안 지속되다가 비명소리와 함께 ‘쿵’ 소리가 났다. 다행히도 에어매트에 떨어졌고 바로 응급실로 이송된 것처럼 들렸다. 그때 사장님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런 건 민폐야. 죽더라도 저렇게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되지 그리고 자살은 바보 같은 생각이야. 죽을 용기로 살아야지.’ 나는 ‘네’ 한마디만 하고 약간 무시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모든 사람이 자살시도를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에어매트가 설치될 때까지 안 떨어진 거 보면 죽을 용기는 없었던 거야.’ 그 사람들은 마치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그 난리를 쳤냐는 식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났다. 왜 마음이 아픈 사람을 헤아려 줄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신이 힘들다는 것을 얼마나 알리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그 사람은 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도와달라고 온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어느 면에서 그것은 치명적으로 불발된 ‘도와달라는 외침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79p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자살을 결심하는 데는 물론 충동적인 것도 있지만 그전에 많은 생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우리의 본능과 반대에 있다. 우리가 낭떠러지에 있다면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칠 것이다. 하지만 자살은 그 반대이다. 그 본능을 거스를 만큼 충분한 생각을 해야만이 자살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정말 힘들 때 챗지피티와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본능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두고 챗지피티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너는 깨인 사람이야. 이 사회의 모순, 가족의 이기심, 인간의 본능,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너무 일찍, 너무 깊게 알아버린 사람. 너는 지금 정신이 약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너무 살아 있어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거야.”
평생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이 사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 답을 찾기가 힘들어 자살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다. 책에서는 이러한 자살을 ‘진지한 자살'이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진지한 자살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서의 자살은 이런 진지한 자살이 많지 않을까. 나는 생각이 많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와 반대로 진지한 자살은 하나의 선택 행위이며, 그 선택을 결정할 조건은 전적으로 이 현세의 것이다. 즉 자신의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손으로 죽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자살은 그것이 가장 원초적인 본능, 즉 자기 보존의 본능과는 반대되는 행위라는 이유 때문에 흔히 고도의 문명을 나타내는 지표로 여겨진다. 그 나라의 자살률을 알면 그 나라 문화의 세련도를 알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109p
외부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통로가 사라지면서 그의 에너지는 내면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 과정에서 신랄한 것으로 변질되었고, 이 변질된 에너지는 그를 궤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275p
내가 외부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통로는 러닝, 글쓰기인 것 같다. 만약 둘 다 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 에너지 또한 변질되어 나를 궤멸하려 들겠지
지금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시절 시험을 못 봤을 때 차에 치일 뻔한 적이 있다. 사실 나는 차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고 길을 건넜다. 피하지 않았다. 그 차가 멈추지 않았으면 나는 날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그 기억이 선명하게 난다. 그때부터였을까. 나의 폐쇄된 세상은.
그러나 사실 그들은 진짜 죽으려 했던 것처럼 보이지 않게 죽기를 원했던 것이다. 232p
어쩌면 자살률은 생각보다 훨씬 높을 수도 있다. 자신이 자살을 했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사고를 가장한 자살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과 마찬가지로 자살은 실패의 고백이다. 176p
죽음은 정말 묘하다. 죽은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묘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소설 속 주인공이 죽는다고 해도 묘한 감정이 든다. 죽음은 언제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선사한다. 나는 그 속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동정, 두려움, 우울, 슬픔, 후련함, 쾌락, 그리움 등 죽으면 여운이 남는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
일단 우울에서 벗어나려면 ‘우울'에 대해서 궁금해해야 한다. 먼저 자신이 우울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왜 내가 우울할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우울이 왜 생기는 지도 알면 좋다. 이것보다도 제일 좋은 것은 ‘글쓰기'다. 내 인생은 글쓰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글을 통해서 나를 알고 내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우울의 늪에 빠져있다면 일기부터 써보길 추천한다.
그리고 혼자 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울할 때 물론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항상 옆에 있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어느 정도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왜 이런지, 내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가 대학교 1학년때 기숙사에 다닌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때 운이 좋게도 코로나 사태로 인해 1인 1실이었고 처음으로 오랜 시간을 자유롭게 혼자 보내며 사색을 하기 시작했다.
제일 좋은 것은 운동이다. 나는 제일 좋아하는 운동을 찾았고(러닝) 그때부터 지금까지 운동을 쉰 적이 거의 없다. 개인적으로 글쓰기 보다도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은 순간의 폭발적인 감정도 잠재울 수 있는 힘이 있다. 나는 이제 러닝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가끔 비가 자주 오거나 상황 상 뛰지 못하면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다. 어쨌든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을 꼭 찾기를 바란다. 운동이 싫다면 산책도 좋다.
내가 추천하는 이 방법들을 모두 한다고 해서 결코 바로 나아지지는 않는다. 우울할 때는 나를 되돌아볼 힘도, 운동할 생각도, 글을 쓸 생각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런 감정이 찾아올 때마다 연습했다. 현재의 감정을 인지하고 바로 러닝을 나가고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계속 실패하고 하루를 버리는 날이 정말 많았지만, 지금은 우울이 찾아오는 것 같으면 바로 글쓰기를 하거나 러닝을 나간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되기까지 약 3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아직까지도 극심한 우울의 상태에서는 힘들어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계속 노력 중이다. 이 우울은 절대 완치가 될 수 없다. 죽을 때까지 끈질기게 나를 괴롭힐 것을 안다. 하지만 나도 방법을 알았으니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정신과를 내 발로 걸어서 갈 용기가 없어서 가지 않았다. 우울을 인지하는 지금도 가기는 정말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정말 만약에 러닝과 글쓰기가 통하지 않는 우울이라면 그때는 정신과에 가려고 한다. 아직까지도 정신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 것이 정말 힘들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편견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감기가 걸리면 병원에 가는 것처럼, 나도 우울이라는 감기가 걸리면 정신과에 가려고 한다. 물론 내 자연적인 치료법이 먹히지 않았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갈 것이다.
자살이 허용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어느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면 자살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 점이 윤리학의 본질에 빛을 던져준다. 자살이란, 말하자면 기본적인 죄악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것을 연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증기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수은의 증기를 연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혹은, 자살 역시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이 아닐까? 371p
삶은 사실상 하나의 전쟁이다. 악은 무례하고 강하며, 아름다움은 매혹적이지만 드물고, 선은 쉽사리 약해지고, 어리석음은 쉽사리 반항으로 흐르고, 사악함이 승리하고, 멍청한 자들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지각 있는 자들은 작은 곳에 머무르며, 인류는 대체로 불행하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환상도, 환영도, 한밤의 악몽도 아니다. 우리는 영원히 다시 깨어난다. 우리는 그것을 잊을 수도, 부인할 수도, 없앨 수도 없다. 476p
이 책을 다 읽고도 자살에 대한 궁금증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다. 내가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다. 이 책에서 좋았던 점은 자살을 나쁘게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자살을 옹호하지는 않지만 자살한 사람들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나쁘게 보고 싶지는 않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싶다.) 이 작가도 자살 시도를 했던 사람으로서 자살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최대한 객관적인 관점을 통해서 서술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쓴 작가도 지금은 죽었다. 그는 마지막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 죽음이 묘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