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자산운용 27층 컨퍼런스룸.
유리창 너머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회의실은 강한식 회장이 가장 아끼는 공간이었다. 가장 상석에 앉은 강 회장을 필두로 매주 월요일 아침 9시에 열리는 주간회의가 시작됐다.
“지난주 금요일 기준, 전체 운용자산 규모가 8조 2천억을 돌파했습니다.”
자산운용 1 본부 김상무의 보고에 강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 부문별 보고가 계속 이어졌지만 태석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태석은 수시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읽지 않음’ 표시가 붙은 메시지가 그의 신경을 긁어댔다.
“다음은 해외사업개발본부의 뉴로링크 투자 건에 대한 보고입니다. 최태석 이사님?”
“네, 현재 뉴로링크와의 지분 인수 협상이 진행 중입니다. 다만, 몇 가지 변수가 생겼습니다.”
“변수? 무슨 변수?”
태석은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넘기며 설명을 이어갔다.
“소프트뱅크 벤처스와 타이거글로벌이 우리보다 높은 기업가치를 제시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파급 효과가 큰 기술이어서 어떻게든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회의실이 술렁였다.
“얼마나 높게 제시했다는 건가?”
“저희가 제시한 가치보다 약 3% 높은 수준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지분 인수 조건도 중요하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밸류에이션 금액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투자운용팀의 차 부장이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끼어들었다.
“최이사님. 정말 가장 큰 문제가 단지 비용일까요? 뉴로링크 대표가 우리 측과 협상 자체에 비협조적이라는 얘기도 있던데요?”
강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회의실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사실무근입니다. 어디에서 그런 뜬소문을 들으신 거죠?”
태석은 강한 어조로 되받아쳤다. 차 부장은 해고당한 고상수의 후배로 그에게 악감을 지니고 있는 터.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직 상대방의 확답을 받지 못한 단계입니다만 초기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고상수 이사님이 계셨더라면....”
“회의 석상에 없는 사람 얘기가 왜 자꾸 나오는 거야? 지금 개인감정을 논하고 있을 땐가!”
“죄송합니다.”
강 회장이 단호하게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차 부장이 황급히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조아렸지만 강 회장의 화살은 다른 곳으로 날았다.
“최이사, 이 건은 자네한테 전권을 줄 테니 자네 실력으로 뭐든 해결해 봐. 대신 안 되면 그 책임은 꼭 져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회의를 끝내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태석은 부하 직원에게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아까 내가 말한 옵션을 추가하도록 하고, 박 팀장은 재무 쪽이랑 얘기해서 딜 가능한 마지노선이 얼마인지 다시 확인해.”
“알겠습니다.”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순간 기대감이 스쳐갔지만 아쉽게도 발신자는 서희였다. 태석은 직원들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여보.”
-우리 몇 시에 어디서 봐?
“뭐?”
-그렇지 않아도 나 이 공연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알았대?
태석은 뜬금없는 서희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이내 그의 시선이 탁상달력을 향했다.
당일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결혼기념일이었다.
태석은 아차 싶었다. 하지만 서희는 알 수 없는 말을 이어갔다.
-꽃다발이랑 티켓은 당신이 준비했으니까 레스토랑은 내가 예약할게. 블루밍 어때? 지난번에 갔던 그 스카이라운지.
태석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알았어. 거기서 보지.”
서둘러 전화를 끊은 태석이 내선으로 비서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이사님.”
“김 비서가 보냈나?”
“예?”
“집사람한테 보낸 선물 말이야. 김 비서가 보낸 거 아냐?”
“저 아닌데요... 죄송합니다. 혹시 오늘 무슨 날이셨나요?”
전혀 알지 못한다는 얼굴로 그를 대하는 김 비서를 보는 태석의 머릿속에는 의문의 물음표가 떠올랐다.
‘대체 누가 결혼기념일을 알고 보낸 거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보낸 공연은 지젤이라는 제목의 발레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공연장의 로비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태석과 서희도 그 인파 속을 나란히 함께 걸었다. 서희가 팔짱을 끼며 배시시 웃었다.
“나 솔직히 아침엔 좀 속상했어.”
“왜?”
“당신 중요한 프로젝트 맡아서 바쁜 건 알지만, 결혼기념일도 잊은 건가 해서....”
태석은 멈춰 서서 서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진지함이 가득했다.
“당신 정말 날 그런 한심한 놈으로 본 거야?”
“응?”
정색을 하고 묻는 태석의 질문에 서현은 순간 놀라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제일 중요한 게 뭔데. 어떻게 결혼기념일을 잊어?”
서현은 그 말에 감동한 듯 눈을 반짝였다.
“여보...”
그러면서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서희. 태석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잠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위기가 잘 넘어갔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최 이사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석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해연과 에단이 서 있었다.
태석의 표정이 굳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순간이었다.
“자, 건배!”
은은한 조명이 감도는 와인 바, 네 개의 와인잔이 가볍게 부딪혔다. 임신을 한 서희의 잔에는 무알콜이 담겨 있었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맛있다는 표정으로 잔을 비웠다.
“그런데, 난 아직도 지젤 이해가 안 돼요. 실연 때문에 미쳐서 자살하다니?”
“그만큼 사랑이 깊었기 때문 아닐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새로운 사랑을 찾으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 여보?”
태석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색하게 입을 떼었다.
“어... 그렇지.”
해연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던 서희는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분은 어떻게 처음 만나셨어요?”
서희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질문을 받은 에단과 해연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병원에서요.”
“병원이요?”
서희가 놀란 눈으로 묻자 에단이 웃으며 답했다.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로 오래 병원에 계셨어요. 그때 담당 간호사로 곁에서 돌봐 준 사람이 해연 씨였죠.”
해연을 바라보는 에단의 시선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태석의 손이 무심코 생수 잔을 들어 입에 대었지만, 빈 잔이었다. 그가 당황해할 때, 해연이 조용히 물병을 들어 태석의 잔에 물을 따라 주었다.
“어머, 팔찌 예쁘다. 좀 봐도 돼요?”
태석은 어정쩡하게 물 잔을 받을 때. 서희가 해연의 손목을 가리켰다.
태석은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서희의 손이 그 팔찌에 닿는 순간, 그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선물 받은 건가 봐요? 여기 이니셜이 있는데요? 포에버 에이치(H), 그리고 이건 티(T)...”
그때, 태석의 손이 와인잔을 덮쳤다.
“엄마야!”
“괜찮아?”
와인이 쏟아져 테이블을 적시자, 서희의 시선이 팔찌에서 떨어졌고, 태석은 재빨리 냅킨을 집어 들었다. 태연한 척했지만, 떨리는 손으로 서희의 옷을 닦는 그의 머릿속엔 오직 하나의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저건... 분명히 그 팔찌다.’
태석은 그날을 떠올렸다.
허름한 모텔방,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과 와인잔, 그리고 해연의 감격에 찬 눈빛까지… 그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날, 그는 해연에게 팔찌를 선물했다. 두 사람의 이름의 이니셜이 새겨진 싸구려 수제 팔찌였다.
-고작 이런 것밖에 해줄 수가 없어서… 미안해.
여린 손목 위에 팔찌를 채워주던 순간, 해연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마음이 담긴 건데… 이보다 더 소중한 게 어디 있겠어요. 나 이거, 평생 풀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해주는 그녀의 모습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깍지 낀 채 맞잡은 손과 그녀의 손목에 새겨진 ‘Forever, HY & TS’라는 글자.
그 옛날의 작은 팔찌가 올가미가 되어 그의 목을 옥죄고 있었다. 태석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오늘 즐거웠어요.”
와인 바 앞, 네 사람은 마주 서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해연과 에단이 차에 오르려는 순간, 서희가 느닷없이 말을 건넸다.
“잠깐만요, 해연 씨. 핸드폰 좀 줘 볼래요?”
서희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해연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휴대폰을 건넸다. 서희는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며 밝은 미소로 말했다.
“이건 제 번호예요. 우리 자주 봐요.”
해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석은 그 장면을 지켜보며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태석과 서희를 태운 차는 조용히 도로를 달렸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그들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연락처는 왜 받았어?”
“응? 아, 해연 씨 말이야?”
“그 사람은 비즈니스와 관련된 사람이야. 괜히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아.”
서희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럴수록 더 친해 둬야지. 이런 게 다 내조잖아.”
“글쎄, 그런 거 할 필요 없다니까!”
차 안의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태석의 차가운 반응에 불쾌함을 느낀 서희의 언성 역시 높아졌다.
“당신 왜 이래?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건데?”
태석은 짜증이 솟구쳤지만, 애써 그것을 감추며 서희를 달래듯 말했다.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야. 당신 몸도 무거운데, 괜히 신경 쓰지 말라는 거야.”
서희는 잠시 침묵했다. 태석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당신은 존재 자체가 나한테 내조라고.”
그 말에 서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고, 태석은 다정하게 그녀를 당겨 안았다.
서희는 한풀 풀어진 얼굴로 그의 품에 안겼다. 태석은 따뜻한 손길로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지만 어깨너머를 향한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