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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빈 Oct 25. 2024

【소설】 완벽한 복수 (3)

태석이 하버드를 다닐 때. 비즈니스 협상학을 가르치던 교수가 말했다. 


“넥타이는 착용자의 품격과 개성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아이템이지. 색깔이나 무늬만 얘기를 하는 게 아냐. 매듭도 일부라고. 그렇기 때문에 비즈니스 자리에서는 더욱 신경을 써야 해.” 


태석은 넥타이를 목에 두르고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매듭을 만들기 시작했다. 


윈저 매듭. 


영국의 윈저 공작이 즐겨했다는 이 매듭을 태석은 중요한 날이 있을 때마다 하곤 했다.

오늘은 새로운 프로젝트의 첫 미팅날. 한 점의 오류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넥타이를 맨 후 커프스단추와 명품 시계까지 착용한 태석. 그는 완벽히 차려입은 자신의 모습을 전면 거울 속에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 스스로 만족하는 듯,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여보, 아직이야?”
“응, 나가.”

아내 서희가 현관 앞에서 배웅차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석은 그녀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사랑해.”
“나도.”

태석은 뒤를 이어 서희의 배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우리 공주님, 사랑한다.”

그러자 서희는 그의 손을 살짝 치며 웃었다.

“아들이면 어쩌려고? 아직은 모른다니까.”
“모르긴 뭘 몰라. 내가 태몽을 꿨잖아. 분명 딸이야, 당신을 꼭 닮은 예쁜 딸.”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서희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못 말린다니까, 정말.”

태석은 서희의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출근길에 나섰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변함없이 평화롭고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42층. 비즈니스 라운지의 문 앞에 서서 태석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 프로젝트만 성공시키면 돼.” 


장인의 신뢰를 얻고 사내에서 낙하산 꼬리표를 떼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 프로젝트를 맡기 위해 그는 거추장스러운 일까지 해야 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성사시켜야 한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자리를 잡고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 한 남자가 일어나 태석을 향해 다가왔다. 


“최태석 이사님? 반갑습니다. 뉴로링크 대표, 에단 김입니다.” 


뉴스 기사 등에서 이미 사진을 본 터. 훤칠하고 잘생긴 얼굴의 남자다. 태석은 악수를 나누며 미소를 지었다.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저희 회사와의 미팅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이렇게 지이익접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재미교포이기 때문일까? 한국어가 유창한 듯 보였지만 약간씩 튀는 발음이 있었다. 


“뉴로링크의 기술력과 저희의 자본이 만나면 시너지가 클 것 같습니다. 저희 쪽에서 드린 제안에 대해서는 검토해 보셨습니까?” 

“아, 그건 말입니다...” 


에단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소파 뒤로 기대앉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여러 투자사에서 제안을 받고 있어서요. 각 투자사의 제안을 꼼꼼히 검토 중입니다.” 


태석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저희는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중요시하는 곳입니다. 단순한 투자를 넘어서 뉴로링크의 성장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특별한 반응을 읽기는 어려웠다. 


태석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뉴로링크에 투자를 하고 지분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태석의 주된 임무였다.

 

어떻게든 에단으로부터 우호적인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고심을 하던 그때. 


“차 한 잔 드시면서 얘기 나누시죠.” 


테이블 위에 놓이는 커피잔과 함께 들려온 음성. 문득 고개를 들었던 태석은 눈앞의 여자를 보고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 이쪽은 이해연 씨입니다. 제 비서이자 앞으로 이 업무와 관련해서 카운터파트 역할을 할 겁니다.” 

“....” 


태석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시간이 멈춘 듯했다. 마주친 시선 속에서 그는 동요했지만 그녀는 차분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 


이윽고 그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최태석 이사님.” 


다소곳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여자. 


이해연이었다. 




보스턴 유학 시절.

생활비 때문에 매번 냉동 피자로 끼니를 때우던 태석은 자신의 생일날 충동적으로 한인 타운에 있는 한국 음식점을 찾았다.

메뉴판 속의 음식들은 하나같이 먹음직스러웠다. 그러나 가격을 확인할 때마다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태석은 그중에서 가장 저렴한 메뉴인 김밥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고 돌아가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왠지 모를 자괴감을 느꼈다.

얼마 후, 종업원이 그가 앉아있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눈앞에 놓인 음식은 자신이 주문한 것이 아니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갈비탕을 놀란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태석은 황급히 종업원을 향해 손을 들었다.

“잠시만요, 이거 내가 주문한 게 아닌데...”


그때, 등뒤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가게 처음이시죠?”


태석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한 젊은 여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새로 오신 분한테 드리는 특별 서비스예요. 앞으로 단골 되시라고요.”

태석은 순간 말을 잊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장난기와 따뜻함이 동시에 묻어 있는 표정. 그녀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또렷이 박혔다.

그것이 그녀, 이해연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 


태석의 머릿속에서 그 한국 음식점이 떠나지 않았다. 그저 한국 음식이 그리운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보고 싶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간고사가 끝나고 유학생들의 모임이 그곳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태석은 처음으로 그 자리에 함께 했다.  


“야, 너희는 이번 중간고사 어떻게 봤어?”

“말도 마라. 교수님 말씀하시는 게 반도 못 알아들었는데 시험이라고 제대로 쳤겠어?” 


영어로 쓰는 리포트의 고단함,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는 힘겨움,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 모두가 비슷한 아픔을 안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때였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여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태석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작은 단상 위, 그녀가 기타를 무릎에 얹고 앉아있었다. 



“휘유~”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장난스러운 휘파람 소리가 이어졌다. 여자는 살짝 미소 지으며 기타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첫 음이 흐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친숙한 멜로디.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


‘사랑이 지나가면’이 흐르기 시작했다. 술잔을 부딪치던 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한숨 소리마저 잦아들었다. 모두가 귀를 기울이는 그녀의 노랫소리는 달빛처럼 부드럽게 공간을 채워갔다. 


태석은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이, 형광등 불빛 아래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드디어 찾은 것처럼, 그의 가슴 한켠이 따뜻하게 채워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렇게 그녀는 태석의 첫사랑이 되었다. 






태석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어떻게 회의를 끝냈는지 모를 지경이다. 그저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 머릿속은 혼란으로 뒤엉켜 있었다. 


‘뭐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신이 버린, 과거의 연인이 바로 눈앞에, 그것도 중요한 비즈니스 자리의 관계자로 등장했다. 이게 우연일 수 있나? 


그는 출국 전, 자신이 받았던 전화를 떠올렸다. 


—이해연 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위독한 상태예요. 당신을 찾고 있으니 지금 빨리…. 


한국으로 오는 내내 그 선택에 대한 후회로 괴로웠다. 하지만 그것은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까지였다. 


입국장에서 그를 맞이하는 서희를 본 순간, 태석은 해연에 대한 모든 것을 지웠다. 


어차피 그는 선택을 했기에.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런데.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잊으려 했던 그녀가 지금 그 앞에 나타나다니.


‘왜 지금, 왜 하필 이런 자리에?’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문을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급히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최 이사님!”

태석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가쁜 숨을 고르며 해연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거 잊으셨어요.” 


그러면서 내민 것은 주차증. 그녀는 다정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보통은 먼저 찾으시던데요. 방문자 도장은 찍어뒀습니다.”

그 순간, 태석의 머릿속에는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하얀 봉투를 내밀며 마찬가지로 미소 짓던 해연의 모습이었다.

-오빠, 이번 학기 등록금이야. 이제 알바 안 하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겠지?

순간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못 이긴 태석이 해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비상구 쪽으로 그녀를 끌고 갔다. 


“아! 최 이사님....” 


그녀가 뭐라 할 겨를도 없이 비상계단 문이 쾅 닫혔다. 태석은 해연을 벽 쪽으로 몰아세우고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한국엔 언제 들어온 거야?”

“...네?”

“내가 여기 있는 거 알고 온 거야?” 


해연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태석을 올려다보았다.


“저...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절 아세요?”
“뭐? 너 정말 왜 이러는 거야? 이제 와서 뭘 어쩌자는 거야!”

그때, 다른 층에서 비상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석은 해연의 손목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밑에서 기다릴 테니까 나와.” 





깊어만 가는 밤. 태석은 차 안에서 빌딩 입구를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회전문은 계속 돌아가고 퇴근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기다림에 지친 태석의 얼굴에 짜증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해연이 로비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서둘러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가던 태석은 몇 발자국을 채 가지 못했다.


고급 세단 한 대가 해연 앞에 멈춰 섰고, 그 차에서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에단였다. 태석은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해연이 에단의 차에 올라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멀어져 가는 차를 바라보며 태석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그들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노려보다가, 다시 차에 올라타 그들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레스토랑 앞에 도착하자, 에단이 해연을 에스코트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비춰지는 두 사람을 잠시 지켜보던 태석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이어지자 그는 잠시 침묵한 뒤 짧게 말했다.


“지금 좀 봅시다.”



태석의 차가 천천히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주차 넘버를 확인한 그는 지정된 자리에 차를 세웠다. 그러자 옆에 정차해 있던 차의 문이 열리고 흥신소 직원이 조용히 태석의 차로 옮겨 탔다.

태석은 이렇다 할 말 대신 봉투를 건넸다. 흥신소 직원은 봉투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사진과 메모지를 확인하며 물었다. 


“이번엔 여자군요. 의뢰 사항은 지난번과 동일합니까?”


태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추가로 일 년 전 즘, 거기 그 주소에 있었을 때 이후의 행적도 파악해서 알려줘요.”

“근데 주소가 미국이라... 이건 시간 좀 걸리겠는데요? 비용도 그렇고.”

“비용은 상관없으니 가능한 한 빨리.” 


흥신소 남자가 히죽 웃으며 답했다. 


“뭐, 알겠습니다. VIP 고객의 명령이시니 최선을 다해보죠.”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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