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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빈 Oct 21. 2024

【소설】 완벽한 복수 (2)

코이라는 물고기가 있다.      


이 물고기는 비단잉어의 한 종류로, 작은 어항 속에서 키우면 8센티미터 정도로 자라는 작은 물고기다.    

 

하지만 이 코이를 연못에 풀어놓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넓은 공간에서 자유롭게 자랄 수 있게 되면, 코이는 20센티미터를 훌쩍 넘게 성장한다.      


더 놀라운 점은 강물에 방류되었을 때다. 강에서 자라난 코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로 자라, 그 위용을 자랑하며 강물 속을 헤엄친다.      


결국, 이 물고기는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크기와 가능성이 완전히 달라지는 존재다.     


이른바 성공한 선배의 초청강연 연사로 섭외되었을 때 태석이 자연스레 떠오른 게 바로 이 코이에 관한 얘기였다.      


그는 지금 그가 졸업한 S대학의 대강당에 서 있다. 그리고 연단 뒤 대형 스크린에는 어항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코이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태석이 리모컨을 누르자 화면이 바뀌었다. 강물 속에서 거대한 잉어가 물 밖으로 힘차게 튀어오르는 장면이었다.     



“와아!”     


학생들 사이에서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렇게 크기가 다른 잉어가 같은 생물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얼굴들이었다.     


“이처럼 똑같은 물고기라도 사는 환경이 어디냐에 따라 작은 관상어가 될 수도 있고, 대형 잉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석은 학생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을 주어 말했다.     


“주어진 환경 안에 안주하지 마세요. 세상은 넓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의 울타리를 뚫고, 더 큰 생각을 품고 더 큰 꿈을 꾸십시오. 그리고 실행에 옮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원하는 그곳에 바로— 여러분이 있을 겁니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태석은 정중한 인사와 함께 강연을 마쳤다.




“이렇게 반응이 좋았던 강연은 처음이에요.”     


강연을 주선한 서미경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인사치레일 수도 있었지만, 기분 좋은 말. 그녀는 하얀 봉투를 태석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건, 약소하지만 강연료입니다.”

“약소하다면 사양하겠습니다.”

“예?”     


놀란 표정의 미경을 보며 태석은 미소를 지었다.     


“후배들을 위해 시간을 낸 거니까, 넣어 두세요. 전 이런 자리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도….”

“정 마음에 걸리시면 대신 점심이나 함께 하죠. 그걸로 좀 거하게.”  

   

태석의 말에 미경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럴까요? 이탈리안 요리 좋아하세요?”

“피자 빼곤 다 괜찮습니다.”

“파스타로 유명한 곳인데, 마음에 드실 거예요. 서희도 가보고 괜찮다고 했거든요.”     


순간 태석의 얼굴 표정이 굳었다.     


“…제 아내를 아십니까?”

“어? 모르셨어요? 저 서희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맹장 수술 때문에 결혼식에 못 갔지만, 나름 절친인 걸요.”

“예에….”     


고개를 끄덕이는 태석. 하지만 아내의 이름이 거론되자, 마음속 깊이 잠재되어 있던 경계심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비서실이었다. 태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쉽지만 식사는 다음 기회로 해야겠군요. 대표님이 호출하셨거든요.”

“아, 정말요? 그럼 할 수 없죠. 다음번에 서희랑 같이 봬요.”

“그러죠. 그럼.”     


예의바른 인사를 남기고, 태석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경이 픽 하니 웃으며 중얼거렸다.     


“서희 이 기집애, 어떻게 저런 남자를 구했대? 초혼도 아닌 게 재주도 좋아. 아니지, 돈이 좋은 건가?




태석이 대표실에 도착했을 때, 안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이래도 아니라고 잡아뗄 건가!!!”     


문을 뚫고 나올 정도로 날카로운 대표의 호통소리. 노기가 등등한 소리 사이사이로 누군가가 호소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충분히 낯이 익은 음성. 태석은 슬쩍 비서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안에 계신 게 혹시 고상수 이사님입니까?”

“예….”

“그렇군요.”     


태석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 대표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고상수 이사. 회사 임원이자 태석의 상사인 그가 분노에 휩싸인 얼굴로 대표실을 나서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태석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목례했지만 고상수는 매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이 달싹거리던 고상수는 결국은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빠져나갔다.     


“최태석 실장님 들어가십니다.”     


비서의 안내에 따라 태석은 대표실로 발을 들였다.     


“부르셨습니까, 대표님.”     


태석은 자신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나오는 것에 안도했다. 특히 오늘은 더욱 더.     


접객 소파 주변으로 사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고, 한 장의 사진에 머물렀다.      


고상수와 웬 여자가 함께 팔짱을 끼고 모텔로 들어가는 사진이었다.      


지극히 상투적인 장면. 입가에 쓴웃음이 맴돌았다. 상황은 명확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하지만 내색은 금물. 태석은 침착하게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양, 그저 솔직한 궁금증으로 전달되도록.    

 

강 대표, 그의 장인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뉴로 AI 그거, 최 실장 자네가 맡게.”   

 

뉴로 AI 프로젝트. 뇌신경 쪽의 의료와 AI 를 연계해 의료기기를 개발하고 있는 미국의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관련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그건 고상수 이사가 진행하기로 되어 있던 거 아닙니까?”

“지금 이걸 보구도 몰라? 고상수 그 놈은 아웃이야!”     


여전히 노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 그의 장인은 흝뿌려진 사진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사생활이 저렇게 지저분한 놈이 일을 제대로 하겠나. 고상수 그놈, 나한테는 자네가 낙하산이라고 늘 불만이더니, 누가 누굴 뭐라 하는 거야!”     


사람에게는 발작 버튼이 있다. 장모의 외도로 상처가 깊은 그의 장인의 경우는 ‘불륜‘이다.     


“어쨌든 잘 됐어.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참에 고상수 후임으로 발령 낼 테니, 제대로 실력을 한번 보여봐.”   

  

태석은 깍듯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장인과의 면담을 끝내고 태석은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     


고상수는 한때 의료 쪽에 투자하여 막대한 성과를 거둔 적이 있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임원 자리까지 올랐던 고상수였기에, 그가 선택한 프로젝트라면 분명히 돈이 될 것이다.     


프로젝트의 잠재력과 성공을 미리 계산한 고상수가 낙점했던 이 프로젝트를, 이제는 자신이 손에 쥐고 결과를 수확할 차례였다.     


그렇게 흡족한 기분으로 차 키를 꺼내 문을 열려고 할 때. 갑자기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최태석! 야, 이 새끼야!”     


역시 예상한 바를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군.


태석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험상궂은 얼굴의 고상수가 서 있었다.      


“너지?”

“뭐가 말입니까?”

“그 사진! 네가 보낸 거잖아!”

“사진…요?”     


태석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아한 듯 되물었다.      


“니가 호시탐탐 내 자릴 노린 거 모를 줄 알아? 그래도 후배라고 봐줬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쳐?!”     


고상수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후배라고 봐줬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고상수는 처음부터 태석의 능력을 두려워했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태석을 깔아뭉개려 했던 사람이었다.


만약 고상수의 험담이 거기에서 그쳤더라면. 태석은 그의 화를 받아주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랬듯, 고상수는 또 선을 넘었다.     


“처가 덕이나 보는 주제에… 분수도 모르는 시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태석의 얼굴 표정이 한순간 변했다.   

   

처가 덕을 보는 주제에.     


그 말은 태석의 발작 스위치와 다름이 없었다.       


그는 웃음기 한 점 없는 얼굴로 고상수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제가 처음 입사했을 때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게 생각납니다. ‘너무 기고만장 하지 마라. 너 같은 낙하산은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고 말이죠. 한 방에 훅 간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고상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 방에 훅 가는 걸 또 이렇게 몸소 보여주실 것까지야.”

“…너 이 새끼….”     


모멸감에 휩싸인 고상수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태석은 그런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며 덧붙였다.      


“어쨌든 마지막 선물로 알고 기억하겠습니다. 선배님.”     


태석은 미련없이 고상수를 지나쳐 차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를 출발시켰다.     


리어 미러로 보이는 고상수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 갔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태석이 떠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는 고상수는 한없이 무기력하게만 보였다.   


“한 방에 훅! 하하하.”     


태석은 자신의 복수가 완벽하게 성공한 것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알지 못했다. 지금 그가 느끼는 이 통쾌함 뒤에, 곧 자신에게 닥쳐올 거대한 폭풍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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