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어? 그게 정말이야? 고상수 이사님이 대리 운전을 뛴다고?”
“그렇다니까. 내가 그 날 동창회 때 술 이빠이 마시고 대리 불렀다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숧이 확 깨더라니까!”
“와, 여기서 짤리고 부인한테도 쫓겨나 거리로 나앉았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네.”
“야, 이거 참. 잠깐 바람 좀 핀 거 치고는 너무한데? 여자 하나 때문에 인생 완전 종친 거잖아.”
“그게, 꼭 그 여자 때문만은 아니지. 내가 들었는데 말이지, 사실 고 이사님이 그렇게 된 건 말이야….”
회의실 밖에서 직원들의 얘기를 듣던 태석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직원들은 황급히 하던 얘기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사님, 나오셨습니까.”
“회의 시작합시다.”
태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직원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회의가 시작되고 업무보고가 이어졌지만 태석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들은 대화가 계속 맴돌았다.
‘고상수가 대리 운전을 하고 있다고?’
뜻밖에 접한 고상수의 소식은 심경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태석은 내심 충격을 받았지만, 표정 관리에 신경 썼다. 하지만 회의를 진행하는 내내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는 불안감은 떨칠 수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뉴로링크에는 그렇게 계약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진행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온 태석은 흥신소 남자에게 전화를 했다.
“일을 맡긴 게 언젠데, 왜 여태 소식이 없는 겁니까?!”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이는 태석과 달리 수화기 저편 흥신소 남자는 변명처럼 말했다.
-파악하는 중입니다. 근데 아무래도 한국이 아니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럼 감시는? 그건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물론, 그건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벌써 한 시간 넘게 백화점인데... 지금은, 아기용품 코너로 가고 있네요.”
순간 태석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기용품?
“잠깐. 지금 어디라고요?”
-백화점입니다. 혼자는 아니고, 웬 임산부랑 같이 있습니다. 둘이 같이 아기옷을 고르는 것 같은데요? 어, 잠시만요. 저 여자가….
흥신소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석은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서둘러 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계속 갔지만 응답이 없었다.
“제발, 받아. 받으라고.”
하지만 돌아온 것은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라는 메시지 뿐.
태석은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였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급히 웃옷을 걸치고 사무실을 나서려 했다.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이사님, 회장님이 찾으십니다.”
회장실 안. 강 회장은 매트 위에서 퍼팅 연습 중이었다.
“금액을 놓고 막바지 조율 중입니다. 성사 직전... 아니, 성사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다름없다라….”
태석의 말을 곱씹던 강 회장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스쳤다.
“골프에서 퍼팅이란 게 말이지, 보기엔 쉬워도 사실 가장 어려운 스윙이야. 왠 줄 아나?”
“아무래도 정교하고 세밀하게 쳐야 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강 회장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게 다가 아니지.”
강 회장은 그립을 되잡으며 신중하게 어프로치 자세를 잡았다. 바로 그 때, 태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놀란 태석은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끊었다. 사라지는 액정 화면에는 흥신소 남자의 이름이 떠 있었다.
“죄송합니다. 꺼둔다는 게...”
그 순간, 강 회장은 퍼팅을 했다. 공은 또르르 굴러 홀 속으로 정확히 들어갔다.
“퍼팅은 멘탈에 좌우되는 스윙이야. 홀이 목전에 보이면, 대부분 평정심을 잃게 되지. 타수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흥분과 불안이 동시에 덮쳐. 내 말 뜻 알겠나?”
태석은 강 회장의 눈을 마주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실을 나온 태석은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서희의 전화는 여전히 통화 불능 상태. 온갖 불길한 상상과 함께 불안감이 가슴을 조였다.
현관 앞에 도착한 그는 키패드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삑삑-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당신 왜 전화가 꺼져 있...”
태석이 말을 멈췄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서희가 아닌 해연이었다. 해연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오셨어요?”
그때 욕실에서 나온 서희가 물었다.
“어? 당신이 이 시간에 어쩐 일로?”
태석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두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해연은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고, 서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석에게 다가왔다. 태석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질문들을 삼키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일찍 끝나서. 그런데 이해연 씨는 어쩐 일로?”
“아, 우리 같이 쇼핑하러 갔다가... 나 오늘 해연 씨 아니면 정말 큰일날 뻔 했어요.”
그러면서 서희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서희가 먼저 연락을 해서 해연과 백화점 쇼핑을 갔던 것, 초롱이 옷을 보던 중 진통이 와서 깜짝 놀랐던 것, 해연의 적절한 도움으로 집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 등.
“몸이 안 좋으면 병원으로 가지, 왜 집으로 온 거야?”
“해연 씨가 괜찮을 거라고 해서요. 정말 신기해. 집에 오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사라졌다니까.”
“출산이 가까워지면 가끔 배가 당기는 것처럼 아플 때가 있어요. 자궁이 수축하면서 오는 가진통이죠.”
해연의 설명에 서희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해연 씨. 아직 결혼도 안 한 사람이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누가 보면 애 몇은 낳아본 줄 알겠어요.”
“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순간 태석의 격앙된 목소리에 서희가 놀라 움찔했다.
“여보! 초롱이 놀라잖아!”
서희의 지적에 태석은 순간 자신을 되찾았다.
“미안. 상대방한테 실례가 되는 말이다 보니....”
“당신 왜 그렇게 정색을 해? 난 그냥 농담이었는데. 해연 씨, 기분 나빴어요?”
“아니요, 전혀.”
그리고 해연은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제가 병원에 있었잖아요. 산부인과는 아니지만, 주워들은 게 좀 있어요. 그런데... 태명이 초롱인가 보죠?”
“네. 이 사람이 처음 초음파 사진 보고 지은 이름이에요. 좀 촌스럽죠?”
“아니에요. 예쁜데요. 초롱초롱, 초롱이...”
해연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태석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해연 씨, 우리 초롱이 방 구경할래요?”
“아니에요, 저 시간이 늦어서 이만 가야겠어요. 초롱이 잘 있어.”
해연이 서희의 배를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태석이 서둘러 웃옷을 걸치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당신 어디 가?”
“늦었잖아. 바래다 드리고 올게.”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해연은 고개를 저었지만 태석은 그녀의 만류를 무시한 채 앞서 걸었다. 서희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타고 가요, 해연 씨. 저 사람이 원래 빚지는 걸 못 견디는 성격이라.”
해연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랐다.
지하 주차장.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태석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꽃도 보내고, 집도 찾아오고... 다음은 뭐지?”
“네?”
“연극은 이제 그만하지 그래? 어차피 여긴 우리 둘뿐이니까.”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인 해연을 보며 태석은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너 대체 원하는 게 뭐야?”
해연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제가 이사님한테 원하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뭐?”
“오히려 제가 묻고 싶어요. 이사님은 저한테 뭘 원하시죠?”
시종일관 모르는 사람인 척, 시치미를 때며 보는 저 눈빛. 흡사 그를 비웃는 것같은 차분한 목소리가 태석의 심기를 건드렸다.
“너... 정말!”
태석이 소리를 높이며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빵- 하고 경적 소리가 울렸다.
요란한 경적 소리와 함께 그들 앞에 아슬아슬하게 와 선 차. 그곳에서 내린 것은 에단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짧은 시간, 태석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어디부터 본 걸까? 아니, 애시당초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해연이 서둘러 말했다.
“최 이사님이 바래다주신다고 해서요. 제가 괜찮다고 하던 참이었어요.”
“흠, 그럼 제가 왔으니 해결됐군요. 갈까요, 해연 씨?”
“네, 저 그만 가보겠습니다.”
해연은 태석에게 짧은 눈길을 보내고는 걸음을 옮겼다.
미묘한 표정으로 태석을 주시하던 에단도 차에 오르고, 그들의 차는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집으로 돌아온 태석은 샤워 후 침대에 기대앉아 책을 읽는 척했다. 그러나 눈길은 자꾸 화장대 앞에 앉은 서희를 향했다.
그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둔 채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두 사람, 무슨 얘기 했어?”
“뭐 그냥, 특별한 건 없었는데.”
“그래도 반나절 넘게 같이 있었는데 뭔가 얘기했을 거 아냐.”
그러자 서희는 태석을 거울 너머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사실은 신경 쓰이는 거구나?”
“뭐?”
“계약이라면 걱정 마. 당신 쪽으로 거의 결정 났대.”
“정말?”
태석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니까. 것 봐, 역시 친해 두길 잘했지?”
서희는 뿌듯한 얼굴로 말했지만 태석은 여전히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겠지. 일개 비서가 뭘 안다고.”
“그냥 비서가 아니라니까? 두 사람 사귀는 사이가 분명해. 그러니까 그 여자가 결정권자나 다름없다고. 당신 같으면 내가 하자는 걸 안 들어주겠어?”
서희는 침대에 누우며 그 당연한 진리를 왜 모르느냐는 듯 말했다.
“남녀 사이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어떻게든 티가 나게 마련이야. 여자들의 촉이 얼마나 날카로운데....”
정말 그런 것일까.
책을 덮은 태석이 서희에게 팔배게를 해주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왜 해연이 자신을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인지.
새로운 남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 역시 옛 연인 따위는 숨기고 싶은 존재가 된 것이다.
마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안도감과 함께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동안의 불안과 의심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상한 감정이 꿈틀거렸다.
해연이 다른 남자와 행복해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이건?’
해연의 새로운 연인이 누구든 그건 더 이상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이제 자신도 마음 편히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아려오는 걸까.
서희가 잠든 것을 확인한 태석은 거실로 나왔다. 온더락 잔을 든 채 내다보는 도시의 야경은 마치 끝없이 펼쳐진 마천루처럼 그의 눈앞에 있었다. 태석은 무표정하게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잔을 단숨에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