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들어선 태석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에단을 발견했다. 종업원이 차를 내오고 물러난 후, 두 사람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마주 보았다.
“뭡니까, 내가 알아야 할 게.”
에단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태석의 입가에 비아냥거리는 미소가 걸렸다.
“그 여자가, 그러니까 이해연이 나에 대해 얘기한 적 있나?”
에단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없겠지, 물론.”
태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놀랐어. 어찌나 천연덕스러운지... 정말 생판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굴더군.”
에단은 계속 침묵을 지켰고, 태석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처음엔 궁금했어. 왜 잡아떼는 걸까? ...그러다 깨달았지. 아, 남자 때문이구나...”
“....”
“당신, 이용당하는 거야. 알아? 과거를 숨기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여자한테 놀아나고 있는 거라고!”
“과거를 숨기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라....”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에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최태석 씨가 말하는 과거란 게 이런 거 아닙니까? 어떤 남자를 사랑해서 유학생활 내내 뒷바라지 해줬는데 정작 그 남자는 여자의 간도, 쓸개도 다 빼먹고 결국은 돈과 배경이 있는 다른 여자를 선택하면서 배신한 거.”
적나라하게 쏟아져 나오는 말. 태석은 놀란 마음에 숨을 들이켰다. 강력한 펀치로 명치를 얹어맞은 느낌이었다.
다 알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이제 알겠어. 둘이 같이 짠 거군.”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모든 게 계획된 거였고, 자신은 이해연과 이 남자의 계략에 놀아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모멸감이 태석의 전신을 적셨다. 그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래, 내가 그 여자, 이해연이를 버렸어. 그게 뭐?”
“…….”
“남자 여자 사귀다 헤어지는 거, 비일비재한 일 아닌가? 지 살자고 낳은 자식도 버리는 판국에 그게 뭐 대수라고!”
태석의 기분은 점점 더러워졌다. 내가 왜 내 상처까지 거론하며 변명을 하고 있어야 하나.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시종일관 비웃는 듯한 미소와 함께 침묵을 지키던 에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꺼낸 태석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이해연은 당신한테 복수 따위를 하러 온 게 아냐. 사랑하지도 않는, 아니, 알지도 못하는 남자한테 복수는 무슨.”
알지도 못한다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해연은 당신을 몰라. 왜냐하면 해연은....”
에단은 태석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최태석 당신을 기억에서 지웠거든.”
“…뭐라고?”
에단이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보이스 레코더.
에단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녹음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해연, ...이해연....이요.
떨리듯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태석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 여기에 오신 이유를 말씀해주시겠어요?
— 기억을 지워준다고 해서요....
“뭐?”
태석은 놀란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았다. 에단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속 들어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환상지통이란 게 있어요. 주로 사지가 절단된 환자들이 경험하는 현상인데... 이미 없어진 부위에서 여전히 고통을 느끼는 거죠. 계속 손이 아프다고 하는 거에요. 실제론 팔이 없는데도.
—없는데도... 아프다...
—기억에는, 존재하니까요. ...지금의 해연 씨처럼.
—네... 그러네요.
—일전에 설명한 대로 우린 이제 해연 씨 기억을 지울 거예요.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옛애인에 대한 기억을 하나도 남김없이.
—그럼 …사랑했던, 그래서 행복했던 기억도 다 사라지는 건가요…?
—네. 모조리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고 기억이 전이되서 재발할 수 있으니까요.
—사랑했던 기억까지... 모조리 다...
—아직 초기 단계라 백 프로 안전하다고 장담은 못해요. 어쩌면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하시겠어요?
해연의 망설임이 느껴지는 침묵이 흘렀다.
—...네. 지워주세요. 그 사람 최태석과 관계된 기억, 모두 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태석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거짓말도 정도껏 해! 기억을 지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말이 안 될 게 뭐가 있지? 당신도 해연을 지웠잖아. 당신의 인생에서.”
맞다. 그랬다.
그녀를 배신하고 떠나오던 순간부터, 태석은 이해연을 자신을 인생에서 지웠다.
하지만.
해연이 자신을 기억에서 지우다니. 그것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가 누군가의 인생에서 지워지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뭐, 댁이 믿건 말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어. 어차피 해연의 복수는 당신을 기억에서 지운 순간 이미 끝났으니까. 나머지는 내 몫이었지.”
“...뭐?”
에단은 그 특유의 냉소적인 미소를 만면에 띄운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약 안 된 거, 결과적으로 당신네 정보 상대편에 흘린 거... 그거 나야.”
재미교포스러운 발음으로 ‘쏘리’라는 말을 남기고, 에단은 돌아섰다. 점점 멀어지는 에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 저 작자가 뭐라고 한 거지?
정보를 상대편에 준 게, 해연이 아니라고?
이 모든 게, 해연이 계획한 게, 아니라고?
해연은 나를,
기억조차
못한다고?
혼란스러웠다. 언제나 명석하던 두뇌회로에 모래알갱이가 낀 느낌이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고 태석은 무의식적으로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태석 씨. 저 서미경입니다. 기억하시죠? 얼마 전에 봤던 서희 친구.
태석은 전화를 끊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날 공연은 잘 보셨나요?
“...공연이요?”
불길함에 목이 메었다.
-네, 그때 강의료 못 챙겨 드린 게 계속 신경이 쓰였어요. 마침 서희가 결혼기념일이라고 해서 ‘지젤’ 발레 공연 티켓과 꽃다발을 보냈는데....
미경의 목소리가 희미해지는 순간, 태석의 손에서 핸드폰이 툭 떨어졌다.
태석은 도로변 가드레일에 등을 기댄 채 술병을 기울였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지웠다. 아니, 지워졌다. 그게 더 정확했다. 그동안 지워내려 했던 건 자신이었는데, 이제 와서 이게 무슨... 태석은 헛웃음을 지었다.
“웃기지 말라고 해...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아무리 싫은 기억이라도 어떻게 지워...”
만취한 태석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도로변에 주저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를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문득 휴대폰이 울렸다. 서희였다.
[여보, 어디예요? 제발 연락 좀 해줘요. 당신 없으면 난 안 돼요.]
태석은 한참을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술기운이 조금 가셨다.
그래. 아직 남은 게 있지.
“다시... 새로 시작하면 되는 거야.”
그가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발걸음이 휘청거렸지만, 마음은 조금 단단해져 있었다.
서희에게로 가면 된다. 애초에 그랬듯, 지금도 다시.
태석은 고개를 들어 택시를 잡으려 보도로 내려섰다. 바로 그 때, 태석의 눈앞이 하얗게 밝아지며 주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태석이 놀라 고개를 돌리는 순간, 거대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무섭게 그를 향해 쏟아졌다. 곧 이어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온몸을 휘감으며 그의 몸은 허공을 날았다.
쿵.
충격이 온몸을 관통하며,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땅에 떨어지는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가운데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뿌옇게 번져가던 시야 속에서도 태석은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고상수였다.
대리기사를 뛰고 있다는 고상수. 그는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태석을 내려다 보았다.
“내가 전에 말했지? 한방에 훅 간다고...크크크크크크....”
고상수는 반미치광이처럼 웃으며 태석을 내려다보았다.
태석은 무언가를 말하려 애쓰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그의 눈앞은 점점 어두워졌다. 의식은 점점 희미해지고, 마침내 그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고요한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태석은 낯선 병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은 흐릿하고 어지러웠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태석 씨, 최태석 씨?”
눈을 깜박이며 정신을 차리자, 눈앞에 한 여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잡혔다. 그녀는 눈물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속삭이듯 불렀다.
“여보…”
태석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긴... 어디죠?”
곁에 서 있던 의사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병원입니다, 최태석 씨. 교통사고가 났던 거 기억나세요?”
“교통...사고요?”
그 순간 강렬하게 비춰오던 헤드라이트가 태석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네, 기억...납니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곁에 서 있던 여자가 다급하게 그를 부축했다. 그러나 태석은 뭔가 껄끄러운 듯 몸을 비틀며 그녀의 손을 피했다.
그러자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금속이 손등에 닿았다. 반지였다.
태석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
“난 정말 당신도 잘못되는 줄 알고….”
그녀는 울먹이다시피 그에게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본 태석이 머뭇머뭇 입을 뗐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시죠?”
그의 무심한 목소리에 서희는 한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태석을 바라보다가 불안한 눈길로 의사를 쳐다보았다.
“선생님, 이 사람 왜 이래요?”
의사는 천천히 태석에게 다가갔다.
“최태석 씨, 여기 이 분이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태석은 다시 한번 서희를 응시했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여보… 나에요. 당신 와이….”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태석은 담담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처음 보는 분인데요.”
서희는 마치 무너져 내리듯 아연실색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선생님. 이거, 혹시 기억상실증인가요?”
“CT나 MRI에서는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일단 다시 한번 검사를 해보도록 하지요.”
그때, 태석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요, 저 기억상실 같은 거 아닙니다. 다 기억합니다.”
서희와 의사는 동시에 태석을 바라보았다.
“이름은 최태석, 나이는 서른두 살, 하버드 경영대학원 졸업 예정이고, 주소는 주소는 44 워싱턴 스트릿 브룩클린….”
그리고 순간, 그의 얼굴에 불현듯 미소가 떠올랐다. 태석은 고개를 들어 서희를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 와이프한테 연락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와이프…요?”
태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 없는 걸 보니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작은 사고가 있었고 괜찮다고 전해 주세요. 아내가 임신 중이라 놀라면 안 되니까요.”
서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그의 얼굴만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태석은 그녀의 반응을 개의치 않고 천천히 핸드폰 번호를 불러주며 말했다.
“이름은 이해연. 폰 넘버는....”
태석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그의 눈앞에 서 있던 서희는 바닥이 꺼져 내리는 듯한 절망 속에서 태석의 입가에 맺힌 그 미소만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녀에게 익숙하지 않은 미소였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따스하고 행복해 보이는 미소가 그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댕그르르.
서희의 손가락 빠진 결혼반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소리가 병실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 첫번째 이야기, '완벽한 복수' 끝 >
루빈이 드리는 말씀.
이렇게 첫번째 이야기가 막을 내렸습니다. (외전이 하나 남아 있긴 합니다만)
오랜만에 다시 쓰는 소설인 까닭인지 생각했던 것보다 잘 표현이 안 되고 늘어졌음을 느낍니다.
다음 편부터는 보다 밀도 있고, 속도감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신 브런처님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