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단의 이야기
기억은 언제나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과거의 조각들. 사람들은 흔히 기억을 아름다운 추억이라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고통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과잉기억증후군 환자다.
매일의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날마다 나를 억누른다. 잊고 싶은 순간조차 생생하게 남아있기에 그 기억을 떠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기억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난 그 반대였다. 난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며 참으로 안타까워하셨다. 뇌과학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특정 기억, 즉 불필요한 기억을 지우는 연구에 매달렸다.
차츰 연구에 진전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내게도 희망을 내비쳤다. 내가 아픔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필요 없는 기억들을 떨쳐낼 수 있도록.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연구가 빛을 보려 할 무렵, 어머니는 기억을 잃어가는 병, 알츠하이머에 걸렸다.
어머니는 점차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기억은 선택적으로 지워지지 않고, 무분별하게 흩어져갔다.
그런 어머니 곁에서 헌신적으로 돌봐주던 사람이 바로 해연이었다. 해연은 간호사로서, 아니 그 이상으로 어머니를 보살폈다. 때로는 나조차 채울 수 없는 어머니의 공허한 마음을 그녀가 채워주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어머니가 남긴 연구를 이어가야 했다. 어머니가 만들고자 했던 세상을 현실로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의 사명이 되었다. 다행히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나의 기억력은 성과를 앞당기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뉴로링크다. 선택적 기억 삭제와 조절이라는 어머니의 꿈을 실현한 결과물, 어머니의 유지를 잇기 위해 나는 이 기술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그즈음, 나는 너무도 달라진 해연과 마주해야 했다. 이전의 따뜻하고 헌신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무기력과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그녀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녀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와 함께 어머니를 돌보며 환하게 웃던 그녀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그러다, 마침내 나는 그녀의 비극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사랑했던 남자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그는 그녀에게 상처만 남기고 떠났고, 해연은 그의 아이마저 잃어버렸다. 절망감에 무너진 그녀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다행히 그녀를 살려낼 수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모든 희망을 잃은 상태였다.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대체 어떻게 해야 그녀를 이 구렁텅이에서 꺼낼 수 있을까?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때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내게 하려고 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그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해연에게 제안을 했다.
“해연…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을 전부 지울 수 있어. 그 상처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줄게.”
그녀는 오랜 시간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머니의 연구를 바탕으로 해연이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했다. 뉴로링크의 기술로 그녀는 고통을 준 그 모든 기억을 떨쳐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어쩌면 나 스스로를 위한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이기에, 해연만큼은 그 과거의 무게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의 기억을 선택적으로 삭제하는 데 성공한 후, 해연은 달라졌다. 그녀의 표정은 밝아졌고, 마음속에 고통을 지우고 나자 한층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변화만으로 기술의 완전성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반응이 단순한 표면적인 변화인지, 아니면 진정한 감정의 자유를 의미하는지 알아보려면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옛 애인과 대면시키기로 했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분명히 사라졌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기억 너머에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와의 만남이 해연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혹은 그저 낯선 타인으로 인식될지 실험이 필요했다. 나는 철저히 임상적 시각으로 이번 만남을 준비했다.
우리는 한국으로 들어왔다. 만남의 날, 그가 눈앞에 등장하자, 해연의 표정은 한순간 흔들리는 듯했지만 곧 평온함을 되찾았다. 마치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오히려 그가 그녀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 애썼으나, 해연은 그를 바라보며 평범한 호기심의 눈길만을 보낼 뿐이었다.
실험은 성공이었다. 해연은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고통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울 수 있다는 기술의 성과를 확인하면서, 나는 가슴 깊이 묘한 해방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며칠 전, 나는 그의 소식을 들었다. 해연을 배신했던 그 남자가 이제는 모든 것을 잃고 홀로 남겨졌다는 소식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에게 원한이 있었던 고상수라는 남자가 그를 차로 들이받았고, 그는 심각한 사고의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고 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부인 서희도 무슨 이유에선지 그와의 이혼을 원한다고 했다. 이제 그의 삶에는 더 이상 돌아갈 곳도, 붙잡을 것도 없는 셈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그 모든 것을 잃은 뒤 오직 해연과의 추억만을 붙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때 해연을 상처 입히고 떠났던 그가 그녀를 잊지 못해, 이제야 보스턴으로 향하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그의 선택이 지금 어떤 결과를 가져왔든, 그것은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일뿐.
해연에게는 이제 새로운 삶이, 자유가 있다. 내가 그녀를 위해 만들어 준 그 자유를, 그가 또다시 짓밟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과거의 기억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새로운 기억을 채워가는 일이다.
나는 과잉기억증후군으로 인해 모든 순간을 생생하게 떠안고 살아왔다. 그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내 삶을 흔들고, 나를 매일 과거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해연과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지금, 그 어떤 과거도 더 이상 나를 휘어잡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그녀와 나의 결혼기념일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히 머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매일이 내 안에서 차곡차곡 쌓여가고, 그 추억들이 내게 진정한 자유를 주고 있었다.
과거는 여전히 내 안에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위에 오늘의 기억들이 차오르고, 내일의 기쁨이 더해질 것이다. 나는 매일의 소중한 순간을 선택하며 살아갈 것이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우리가 만들어가는 기억만이 나의 삶을 채울 것이다.
그것이 내가 잊지 않을, 우리의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