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빈 5시간전

【소설】나일 수도 있었다 (1)

옷장이 빼곡히 차 있어도, 마땅히 입고 나갈 옷이 없다는 건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일이다.


드르륵. 드르륵.


옷장 행거에 걸린 옷들이 이리저리 춤을 춘다. 하지만 아무리 옷을 뒤적여도 마땅한 것이 없다. 몇 벌 되지 않는 정장은 모두 검은색이고 오늘 같은 날은 어울리지 않는다.


시간은 점점 가고 나는 초조해졌다. 지금 출발해도 결혼식장에는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거다. 하는 수없이 그래도 가장 최근에 산 정장을 꺼내 들었다. 하얀색 옷이야 민폐 하객룩이지만 검은색 정장이 민폐라는 얘기는 듣지 못했으니까.


‘왜? 차라리 민폐를 끼치고 싶은 건 아니고?’


내 마음 깊은 곳의 내가 빈정거리며 묻는다.  


어쩌면 그럴 지도.


옷장 밖에 걸어둔 핑크색 원피스에 시선이 간다. 오늘을 위해 준비된 명품. 내게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며 물개박수를 치던 명품샵 직원이 떠오른다. 결혼 선물이니 오늘 꼭 입고 오라며 떠안기던 선애의 얼굴도.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뻗었다.


검은색 셔츠와 H라인 스커트, 검은색 스타킹을 신고 검은색 재킷을 걸친다. 그러고 현관 앞 거울을 보니 내가 지금 출근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을 가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간다.


그런 나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내가 꼭 가야 하는 걸까?’


어쩌면 가는 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때, 청첩장 위에 놓인 핸드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원장님이셨다.


[주연아. 어떻게... 너 올 수 있겠니?]


메시지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원장님이 얼마나 망설이고 속을 썩으셨을지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럼요. 저 출발했는걸요? 이따 신부대기실에서 봬요.]


답신을 보냈다. 이제는 빼박이다. 늦을 게 분명하지만, 가서 어떠한 얼굴로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하아. 정말 가지가지하네.”


우산을 가지러 다시 반지하 계단을 내려가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이사할 때 비가 오면 대박이라는 속설은 있지만, 결혼하는 날 비가 오는 것도 해당이 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재수 옴 붙은 날 하는 결혼인 건지.




예식홀 로비는 하객들로 북적였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옷차림으로 한껏 멋을 낸 사람들 속에서 온통 검정 투성이인 나는 한 마리의 까마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다. 어깨를 바로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지만 속으로 자꾸 움츠러드는 마음은.


그리고 알림판 앞에 도달했다.


[신랑 노일훈, 신부 나선애]


나는 한참을 그 앞에서 머물렀다.


너무나도 친근한 이름들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낯설게만 느껴진다.


어떻게 이 두 사람의 결합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아니, 나선애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노일훈의 옆에는....


“지금부터 신랑 노일훈 군과 신부 나선애 양의 결혼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안내방송이 상념을 깨부수었다. 나는 입장을 재촉하는 소리에 떠밀리듯 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신랑 입장!”


밝고 경쾌한 음악소리와 함께 걸어 들어오는 노일훈. 턱시도를 입은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식장의 뒤편 한구석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


옆에 선 중년의 하객이 수선스레 말한다.


“아니 뉘 집 아들이래? 신랑이 인물이 진짜 좋네.”

“고아예요.”

“엉?”


불쑥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에 중년 하객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앞을 주시했다.


“이어서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하객 여러분께서는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에게 힘찬 박수와 환호 부탁드리겠습니다. 신부 입장!”


웅장한 웨딩마치가 울린다. 그리고 아버지의 팔짱을 낀 채 입장하는 나선애.


스쳐가는 옆모습을 보니 선애의 미소가 너무나 찬란하다. 마뜩잖음이 완연히 드러나는 신부 아버지의 얼굴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저렇게 좋은 것일까? 이 결혼이? 내게서 또 무언가를 빼앗아 가는 것이?


“드레스 완전 예쁘다. 어느 샵에서 했대?”

“저거 베라 왕일 걸, 아마?”

“저엉말? 그럼 천 가까이 되겠네?”


고개를 돌려 보니 우측에 서 있는 여자 셋이 사진을 찍으며 수다를 떨고 있다. 한껏 하객 패션을 뽐내고 있는 또래의 여자들. 아마도 신부 측 친구들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갑자기 결혼이라니. 진짜 깜놀이다. 선애 쟤 완전 모쏠에 철벽녀였잖아.”

“야, 남자 비주얼 봐라. 쟤도 얼빠였나 보지 뭐.”

“그래도 만난 지 3개월 밖에 안 됐다며. 근데 연애도 아니고 결혼을?”

“정답 딱 나오지 않냐? 속도위반.”


키득거리는 소리를 듣노라니 언젠가 선애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진짜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없어.’


정말 그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뭐? 나라고 별반 차이가 있나?


나는 다시 선애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았다.


명품 웨딩드레스를 입고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너.


그런 너를 보며 생각한다.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일 수도 있었다, 고.



그러나 모든 건 그날 이후 달라졌다. 어쩌면 3개월 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선애와 다시 마주쳤을 때부터.




영화가 끝났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은 하나둘 자리를 벗어났다. 나 역시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서는데 일훈은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 가?”

“잠깐. 이것만 확인하고.”


토요일 밤이면 늘 거치는 통과의례. 오늘도 변함없이 일훈은 로또 당첨 여부를 확인한다. 그리고 잠시간의 희망에 들떴던 그의 잘생긴 미간은 몇 초 사이로 구겨진다.


그의 반응 만으로도 알겠다. 오늘도 낙첨. 5천 원짜리도 되지 않은 걸 테다.


일훈을 끌고 근처 음식점으로 왔다.


“뚝불 2개요.”


나는 그를 대신해 주문을 했다. 뚝배기 불고기는 일훈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일종의 소울푸드라고나 할까.


“도대체 이런 거 되는 놈은 어떤 운을 타고난 거야....”


일훈은 로또를 북북 찢으며 투덜거렸다.


기대가 없어야 실망도 없는 법이다. 그런데 일훈은 늘 저렇게 허황된 기대를 하고 매번 낙심을 한다.


일훈은 한때 아이돌 지망생이었다.


보육원 때부터 타고난 외모와 큰 키로 눈에 띄던 아이였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그는 조숙했고, 자신이 성공할 방법은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달라야 함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고등학교 때 학교까지 그만두고 기획사 연습생으로 들어갔다.


잘생긴 얼굴과 눈에 띄는 분위기 덕에 연습생 중에서는 꽤 주목을 받았다. 나도 그가 언젠가 꼭 무대 위에서 빛날 거라 믿었다. 하지만.


데뷔를 목전에 두고 기획사가 망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청소년기를 모조리 춤과 노래에 바친 아이. 법적 중졸이 제대로 된 직장을 얻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 그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매일 이런저런 알바로 생활비를 번다. 그리고 이렇게 매주 로또를 사는 게 유일한 낙이다.


일훈은 여전히 한순간에 인생을 바꿀 행운을 바라지만 나는 그런 게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그를 볼 때면 심경이 복잡해진다.


“자,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김이 오르는 뚝배기가 나온 동시에 핸드폰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내 사수인 조 실장이었다.


“네, 실장님. …지금요?”


나는 흘깃 일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주인이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강아지마냥 처량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하지만 그 눈빛의 밑바닥에는 체념이 있다는 걸 우리 둘 다 안다.


“그럼요, 저야 항상 스탠바이죠. 네, 금방 갈게요. 미안. 나 지금 가 봐야겠다.”

“밥은 먹고 가면 안 돼?”

“고객님 이미 와서 기다리고 계신단다.”

“에이,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어째 넌....”


일훈도 익숙한 일인 만큼 투덜투덜거리면서도 나를 따라 일어섰다.


“그래, 이런 게 뭐 어디 하루이틀이냐. 저기요, 이거 포장 좀 해주세요.”


일훈의 그 요청을 뒤로하며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유가족은 30대 여자였다. 슬프다기보다는 지친 얼굴로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는 그녀는 고인의 딸이었다.


나는 그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준비된 팸플렛을 보여주며 장례 절차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보통은 중간 걸로 많이 하세요. 솔송나무 관에다 대마 백 프로인 특명품 수의도 제공되고….”

“그냥 제일 싼 걸로 해줘요.”


내 말을 자르고 들어선 유족. 말에 힘은 없었지만 단호했다. 그녀의 입가에 조소가 흘렀다.


“아버지? 하. 십 년 동안 얼굴도 보지 못한 양반이에요. 무연고자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 할 도리는 다 했어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노라 했다. 그리 놀라울 것 없는 일이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각양각색의 부모자식 관계를 보아왔다.


어떤 자식은 부모의 빈소를 떠나지 못하고 무너지듯 흐느끼지만, 또 다른 자식은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차갑게 등을 돌리기도 한다. 오래도록 함께여서 애틋한 경우도 있지만,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기에 더더욱 남보다 못한 이들도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뭔가 당연한 것이란 없다는 걸 자연스레 깨달았다.


마지막 순간에 함께 울지 않는 자식이 있다고 해서 그 관계가 더 가볍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저 각자의 배웅 방식이 있을 뿐이다.


유족과의 상담이 끝났으니 이제 빈소를 차리는 일만 남았다. 일단은 조실장에서 현 상황보고를 했다.


“네, 1호로 하시겠답니다. 도우미는 그냥 저만 있어도 될 거 같아요.”


실장도 그리하라 한다. 이제 서둘러 빈소를  준비해야 한다. 장례식장에도 얘기하러 복도를 따라 걷는데 저 앞에서 값비싼 근조 화환이 줄줄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특호실 앞이다.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 돌아가셨기에.


영정 사진에는 고령의 남자 얼굴이 자리 잡고 있다. 일반 사람이 봐도 이른바 어르신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인상의 얼굴이다.


이 호화로운 조문실을 지나노라니 문득, 내가 준비할 빈소가 떠올랐다. 조화 몇 송이와 적막이 가득할 그곳, 단출한 상주가 지킬 고요한 공간. 마치 한쪽은 세상에 남은 흔적을 치장하듯 준비된 무대 같고, 내가 준비할 빈소는 그저 조용히 잊힐 무명배우의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져 서글펐다.


“어이어이 김주연 씨. 딴생각은 금물!”


한 차례 기합을 넣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맡은 장례식은 고요히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간의 쉬는 시간. 바람을 쐴 겸 장례식장 뒤편의 벤치로 나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문상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흡연 중이었다.


벤치에 앉으니 일훈이 전화를 걸어왔고, 우리는 늘 그렇듯 사소한 실랑이를 벌였다.


“문상객들 대접하면서 중간중간 먹으면 돼. 그래,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까? 오긴 어딜 온다고.”


내가 저녁도 못 먹고 일을 하고 있는 게 안타까운 모양이다. 포장한 뚝불을 들고 오겠다는 것을 간신히 말렸다. 전화를 끊고 나니 담배가 간절해진다. 딱 한 대만 피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김주연 씨?”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젊은 여자였다. 가로등 불빛을 등진 여자는 눈을 껌뻑이며 나를 뜯어보더니 손뼉을 쳤다.


“맞구나, 주연 언니!”


나는 이렇다 할 대답을 못하고 엉거주춤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비로소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여자는 얼굴 한가득 반가운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나 선애야, 선애. 자애보육원 때, 같이 있던. 기억 안 나?”


순간 놀란 숨이 턱 막혔다.


“…유선애?”


<  계 속 >


이전 11화 당신의 하루를 1억에 삽니다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