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태석의 목소리가 사무실 안을 가르며 울렸다. 그의 앞에 선 김 과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방금 연락받았습니다. 뉴로링크는 타이거 글로벌과 계약을 체결하겠다고...”
태석은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려나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어제까지도 우리랑 얘기를 하고 있었잖습니까! 최종 조건에 다 합의했다면서요? 그런데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김 과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게, 막판에 다른 회사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고...”
“그게 말이 됩니까? 우리가 제시한 금액은 업계 최고였어요. 그걸 뛰어넘는 조건이 어떻게 하루만에 나온단 말입니까?”
태석은 책상 위의 서류들을 휘저었다. 며칠 밤을 새워 준비한 수정 문서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불같이 화를 내는 태석의 모습에 사무실 유리창 너머로 직원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태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집어 들어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떨어지자마자 에단의 목소리가 반갑다는 듯 들려왔다.
-이런, 직접 전화 주셨네요. 저도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에단,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태석은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며 묻기 시작했다.
“우리 쪽으로 결정된 거 아니었습니까?”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가, 에단의 낮은 웃음이 전화를 타고 들려왔다.
-거의, 그랬죠.
“그런데 갑자기 뒤집은 이유가 뭡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른 투자사의 조건이 더 좋았으니까요.
“지금 그걸 믿으란 소립니까? 대체 얼마나 큰 금액을 불렀기에!
태석이 이를 악물며 쏘아붙였다. 그러자 에단이 흥미롭다는 듯 한층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만 단위로 한 장 더.”
“…뭐라고요?”
태석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최 이사님 쪽에서 제시한 금액보다 저쪽이 정확히 한 장 더 얹었다는 겁니다.
말도 안 돼. 순간 뒷통수를 후려 맞은 것 같은 느낌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에단은 그의 침묵을 느낀 듯 조용히 덧붙였다.
-참 신기하죠? 꼭 누가 정보를 흘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에단의 비웃는 듯한 목소리에 태석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태석은 창가로 걸어가 이마를 차가운 유리에 기댔다.
터무니없이 작은 금액 차이로 모든 협상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이상했어. 호의적일 리가 없는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했는데. 결국 이거였어. 안심시켜서 막판에 물을 먹이려는 속셈이었던 거지.’
그때 다시 핸드폰이 진동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봤지만 액정에 떠오른 발신자는 서희였다.
“어, 나야. 왜?”
-당신 지금 어디야? 지금 좀 들어오면 안 돼? 나 아무래도 상태가 좀 이상한데….
“지난번에도 그랬잖아. 가진통, 뭐 그런 거라며.”
걱정보다는 성가심이 앞섰다. 이대로 서희를 만나더라도 화를 억누를 자신도 없었다. 차라리 지금은 외면하는 게 상책이다.
“지금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 끊어.”
-여, 여보!
태석은 핸드폰을 끊고 아예 전원을 차단했다.
“저, 회장님 보고는 어떻게 할까요?”
김 과장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장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다음 주 주례회의에서 투자 계획을 발표하겠다고 공언한 상태.
태석은 이를 악물고 이성을 되찾으려 했다. 아무리 수치스러운 상황이어도 지금은 참아야 한다.
태석은 서둘러 사무실을 나서며 김 과장에게 말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말씀드리지 말아요. 아직 마지막 카드가 남아 있으니.”
“최 이사님이 여긴 어떻게….”
이미 흥신소를 통해 사람을 붙여 놓았던 터. 해연이 묵고 있는 곳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역시나 훌륭한 연기자였다. 자신의 집 앞에 불쑥 나타난 태석을 놀라움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절망이 뒤섞인 감정이 목구멍을 조여왔다. 태석은 치솟는 감정을 억누른 채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도와줘.”
“네?”
“내가 너한테 못할 짓 한 건 알아. 그건 사실이야. 그래도 옛정을 봐서, 한 번만 도와줘라.”
“최 이사님....”
태석은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타이르듯 말했다.
“너도 네 살 길 찾았잖아. 새 출발했잖아. 그러니까 우리, 지난 일은 다 잊자. 응? 따지고 보면, 네가 김 대표 같은 남자랑 함께할 수 있었던 것도 나랑 헤어졌기 때문이잖아. 그러니까...”
하지만.
돌아온 것은 어이없다는 표정의 대꾸일 뿐.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만약 계약 건 때문에 이러시는 거라면, 그건 대표님이 결정하신 사항이라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해연아... 그러지 말고….”
태석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섰다.
“저한테 대체 왜 이러세요….”
“계속 이렇게 나올 거야? 너도 나 망가지는 거 보고 싶진 않을 거 아니야. 그래도 우리, 한때 사랑했잖아. 그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사랑요?”
뒷걸음질 치던 해연이 걸음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당혹스럽다는 듯 반문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진저리를 치는 것처럼 몸을 떨며 외쳤다.
“정말 왜 이러세요! 전 최 이사님 여기 와서 처음 봤다고요! 그런데 왜 자꾸….”
태석의 인내심이 무너졌다.
“대체 언제까지 시치미를 뗄 셈이야! 니 얼굴, 그 이름, 그리고….”
그는 해연의 손목을 덥석 잡아 올렸다.
“내가 준 이 팔찌까지! 이렇게 다 똑같은데!”
“아악!”
순간 태석의 손에 붙잡힌 해연의 팔에 또 다른 손이 얹혔다. 에단이었다.
“당장 놔요, 그 손.”
“대표님!”
해연은 안도한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태석은 여전히 해연을 붙잡은 채, 분노로 에단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제삼자는 빠져!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최태석, 당신 정말....”
둘은 서로를 밀치며 몸싸움에 휘말렸다. 그 와중에 어느 순간 누군가의 팔꿈치가 해연의 얼굴을 스치며 그녀가 비명을 지르듯 주저앉았다. 태석과 에단은 동시에 그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연의 얼굴을 감싸 쥔 손 사이로 선홍빛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알만한 분이 왜 그러셨어요?”
“몇 번을 말합니까? 이건 우발적인 사고라고요!”
“우발적이라뇨. 기다렸잖습니까, 집 앞에서. 그것도 야심한 밤에.”
조서를 작성하는 경찰은 쯧쯧 혀까지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였습니다.”
“따로 할 얘기라. 그게 뭔데요?”
“이미 말했잖습니까. 비즈니스 관계로….”
“아니, 그러니까, 사장도 아니고 비서 아가씨가 뭔 힘이 있다고 비즈니스를 오밤중에 따로 합니까?”
다분히 비아냥거리는 경찰의 태도에 태석은 마침내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 여자 불러요! 대질심문 합시다. 그럼 진실이 뭔지 알게 될 테니.”
“스토커에 협박범을 보고 싶어 하는 피해자도 있답니까?”
그 말에 태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당신 지금 그 말, 명백한 명예훼손이야, 알아?!"
경찰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책상을 쾅 내려쳤다.
"이봐요, 최태석 씨! 혼자 사는 여자를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습격한 건 사실 아닌가? 이건 계약 틀어졌다고 단순 행패 부린 게 아니라 협박에 스토킹까지 얽힌 폭행 사건이라니까요! 상황판단이 안 되세요?"
태석은 기가 찬 듯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 이해연이 놓은 덫에 걸려든 자신의 꼴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사내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핸드폰의 전원을 넣을 때였다.
누군가 다가와서 취조를 담당한 경찰에게 무언가 속닥거렸다. 경찰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흘깃 보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피해자분이 고소를 취하하겠답니다. 고맙다는 인사나 해요.”
이해연. 그래도 네가 마지막 양심은 있구나.
태석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 지난 하루가 악몽과도 같았다.
전원이 들어온 핸드폰에서 수많은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발신자의 대부분은 서희였다. 마지막으로 찍힌 번호를 본 태석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장인인 강 회장의 번호였다.
잠시 고민하던 태석은 결국 전화를 걸었다.
“네, 장인어른. 죄송합니다. 밑에 직원이 부친상을 당해서. …네? 그게 무슨?”
태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계속해서 들려온 말에 그의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서희가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는 소식이었다. 태석은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사색이 된 얼굴의 태석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병실로 달려왔다. 문을 열고 나오던 강 회장과 마주친 순간, 태석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예정일은 아직 한 달 넘게 남았는….”
태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 회장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휘청거리며 나가떨어진 태석은 얼굴을 감싸 쥔 채 강 회장을 올려다보았다.
“애가 저 지경이 되도록 넌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
“이게 죄송으로 끝날 일인 줄 알아?!”
강 회장은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더니 휙 하니 몸을 돌렸다. 곁에 있던 비서가 태석을 일으켜 세우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사모님보다는 담당의를 먼저 만나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난 산부인과 담당의는 태석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태반 조기 박리로 태아는 이미 사산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산모 쪽도 출혈이 너무 많아서, 자궁을 적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앞으로 아기는....”
의사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정 원하신다면 입양을 생각해 보시는 수밖에...”
태석은 힘없이 눈을 내리감았다.
병실 안. 서희는 창백한 얼굴로 링거를 꽂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는 침상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앉아 서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자책과 후회가 담겨 있었다.
'당신 지금 들어오면 안 돼요? 아무래도 상태가 이상한데...'
서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태석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란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더욱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잠시 후 태석은 무언가 결심한 듯 벌떡 일어섰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나만 이렇게 당할 수는 없지.”
병실을 나온 태석은 핏발 선 눈으로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시작은 네가 했을지 몰라도 끝은 내가 낼 거야.”
< 마지막 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