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가 언제 바뀌지, 지루해 죽겠네. 이러면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 어린아이가 걷기에는 지루했던 긴 길을 걸을 때는 부러 뒤를 보며 걷곤 했다. 목적지까지 남은 길을 보면서 걸을 바에야 뒤에 얼마나 많이 왔는지를 보면서 안심했다.
어느 날은 긴 길을 걷는 게 너무 지루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게다가 이 길을 걸으면 날 기다리는 것은 사거리의 신호가 긴 횡단보도. 그날따라 지루해서 뒤를 자주 돌아봤다 보니 얼마 안 걸어온 것 같아서 더 화가 났다. 어렸던 나는 지혜롭지 못했기에(지금 지혜롭다는 의미는 아니다) 땅바닥을 보았다. 땅바닥을 보며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지금 생각하니 엄청 위험하다.)
그랬더니 어느새 나는 긴 길을 다 지나왔고 횡단보도 앞에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굉장히 긴 길이 있었다. 아직도 그때의 장면을 잊지 못한다.
이 긴 길을 짜증 내지 않고 걸어왔단 말이야? 항상 이 길을 걷기 전에 한숨만 푹푹 쉬고 겨우 도착해서는 횡단보도에 막혀서 또 짜증 났었는데.
그다음부터는 땅바닥도 보고, 벽장도 보고, 하늘도 봤다. 벽돌이 모자랐는지 어색한 패턴으로 혼자 덩그러니 있는 다른 색의 벽돌도 보고, 벽돌 사이의 민들레도 보고, 담장의 찔레꽃도 보았고 구름의 모양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지금'을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어렸을 때 삶과 생활에서 배웠던 모든 것은 다 초기화가 되고 말았다. 하나씩 잃어버려서 지금 찾으려니 아무것도 없다. 새로 시작해야 하더라.
우울증이 제일 심했을 때, 침대에서 울면서 늘 했던 생각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함뿐이었다. 현재만 따져보면 나는 따뜻한 침대에 누워있는 건데.
이렇게 살다 간 죽을 것 같아서 현재만, 지금 이 순간만 바라보았다. 과거에서 반성을 안 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안 세운다고 한심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나의 삶이 끝날 것 같은 이 상황에서 반성과 계획은 그림의 떡이었다.
눈 앞의 아메리카노는 산미가 어떤가, 이 친구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이 강의의 이 부분은 힘들다.
이 생각은 연속적으로 다른 생각으로 이어졌다. 아주 자연스럽게.
산미가 강하지 않은 아메리카노 집을 찾아볼까, 이 친구와 다음에도 만날까, 이 강의는 포기할까 말까.
더 나아가서
아메리카노를 만들어볼까-> 취미 생김. 친구에게 먼저 연락해볼까 -> 대화할 사람 생김. 이 강의는 교수님에게 도움을 구해볼까 -> 지식이 생김.
이 모든 연속적인 생각은 생활로, 그리고 나의 힘든 현재를 과거로 만들어주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물을 마신다. 모카포트에 원두를 넣고 물을 올리고 동시에 함께 먹을 토스트를 만든다. 언제 이렇게 자연스러워졌지? 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우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곧 졸업이다. 대학생활 너무 막막하고 힘들어서 시작한 게 브런치였는데.
하지만 난 여전히 조급하고 미련하다. 과거를 계속 들춰보고 미래를 끊임없이 예상하면서 괴로워하고 있다. 무섭다. 내 인생이 후회와 불안이 다일까봐. 잘 안 되지만 그래도 이젠 방법을 안다. 힘들고 불안할수록 현재를 보는 것. 지금 나는 아메리카노 한잔에 글을 쓰고 있다.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내가.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