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그래 봅니다.
할머니 그럼 다음 추석 아니 설날엔 꼭 내려갈게요. 또 전화드릴게요.
철경아.
네?
재밌게 살아.
취준생인 손녀에게 할머니가 해 주는 말이, 재밌게 살라니. 나는 지금 재미있으면 안 되지 않나? 내가 마음의 여유를 가져도 괜찮을 걸까?
“아~ 오늘도 한 일에 비해 보람차지 않았다~.”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전부를 하고 있지만 그 어떤 보상도 오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지. 자소서와 이력이 화려해져도 떨어지곤 한다. 정말 가고 싶던 회사에 힘을 주고 이력서를 썼더니 이력서에 실수를 3개나 했다. 그리고 떨어졌다. 그래도, 포폴도, 경력 기술서도, 자소서도, 심지어 작년엔 붙었는데. 그러나 우연히 알았다. 작년에는 2번의 채용을 진행했으며 이번엔 1년 만에 처음 진행했음을. 그리고 신입과 경력이 나뉜 작년 채용에 비해 이번엔 한 번에 뽑았다는 것도. 그러면 당연히 경력을 뽑았거나, 인턴 경험이 있는 사람이 우선시 되었겠지. 게다가 난 이력서에 실수도 했다.
힘이 빠진다. 마음에는 힘이 빠지고 몸과 머리에는 힘이 들어간다. 가고 싶던 회사들이 탈락하거나 접수가 끝나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오늘도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간다. 가을 하늘이 공활하다. 너무 예쁘다. 이걸 보면서 집에서 커피나 차를 마실 생각에 행복하다. 행복해.
행복하다고? 그러면 안되지. 너는 지금 서류 몇 개 탈락했어? 겨우 붙어도 면접이랑 시험에서 떨어지고 있잖아. 흐름이 전혀 좋지 않고 심지어 너는 취. 준. 생!이라고 먹는 약도 줄었다가 다시 몇 배로 늘어난 주제에. 뭐가 행복해 넌 자격이 없어.
라며 두 개의 생각이 충돌하는 장면을 보았다.
#mood에 취한 나와 취준생 모드에 취한 내가 멱살 잡고 싸우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행복하면 안 되는 걸까. 그래도 하루하루 행복한 순간 정도는 있어야, 이 긴 터널을 건강하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친구들을 만날 때도 힘들고, 친척들, 가족들과의 대화도 힘들고, 탈락 소식과 공부는 더욱 힘든데, 계속 힘듦 힘듦 힘듦만 하다가 끝난 하루를 굳이 선택할 필요가 있을까?
오늘따라 일이 안 풀렸는데 금전적 여유가 없어 비싼 음식을 못 사 먹는다고 해도. 집에 있는 인스턴트커피, 드립 커피로 노을을 감상하면서, ‘감히’.
행복하다.
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이 일상에서 늘어지는 건 경계해야 한다. 이 일상은 끝내고 싶다. 살만해서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라고 생각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뿐일 테니까. 무언가가 정해진 사람이라면 그래도 되겠지만 결과를 내는 사람은 어찌 되었든 긴장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정해진 일정 같은 건 잊어버리세요. 시간은 필요한 만큼 걸릴 겁니다.
팀 페리스 <타이탄의 도구들> 중.
어차피 걸릴 시간이라면, 내가 아등바등해도 필요한 만큼 걸린다면, 조금 더 효과적으로 집중할 수 있게, 아니 꼭 그런 목적이 아니어도 좋다. 좋아하는 순간들에서는 행복해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언제부터 이것저것 계산하기 시작했지? 암산하고 계산하는 건 인적성 자료해석에서 끝내고 싶다. 굳이 애 안 써도 계산해야 할 것 투성이니까. 요즘은 노을이든, 아침햇살이든, 때가 되어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참 좋다. 그 순간에 넘칠듯한 행복을 느낀다. 최고의 작업실이지. 드립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