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두고 ‘감히’ 잘 지내기로 했다.

무슨 하늘 밑에 있어도 너는 X같다고 하니까.

by chul
KakaoTalk_20210822_173030373_03.jpg 아이 귀여워
오늘은 어땠어?
똑같아, X같아.

X는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최대한의 ‘일이 잘 안 풀리고 막막한 상황’을 뜻하는 아무 단어나 넣어도 된다. 한때 같이 지냈던 친구는 하루의 안부를 물으면 항상 똑같이 'X 같다'라고 했다.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필요한 말을 걸어도 굉장히 날카롭게 대했기 때문에 기분 풀어줄 겸 안부를 물으면 결국 똑같은 대화가 반복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무언가를 이루지 못 한 사람은 그 죄목으로 추석 때 친척들이나 가족들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코로나 때문에 더욱. 몇 번째일지 모를 추석을 혼자 지내면서 그 친구와 통화를 하는데, 다짜고짜 한숨을 쉬면서 하는 얘기는 여전했다.

우리 너무 비참하지 않아? 너도나도 이게 추석 때 뭐하는 짓이냐. 우리 너무 둘 다 아무것도 못 얻고 올해도 또 혼자 추석 지내는 거 말이야. 다들 잘 사는데, 에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KakaoTalk_20210822_173030373_02.jpg 그림은 항상 색상을 결정하는게 큰 일입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추석쯤 좋아하는 작가님에게 보낸 메시지 답글을 받았다. 심지어 개인 계정에 적은 감상평에서도 (아마 태그 때문이겠지만) 반응을 해 주셨다.

그래서 ‘감히’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 친구 말대로 나는 최종 면접에 떨어졌고 2년이란 취업 공백기가 생겼으며 여전히 부모님께 어느 정도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는, 또래 애들에 비하면 독립을 늦게 한 상황이지만. 쓰고 싶은 글도 정리를 했고, 서로의 미숙함으로 연락이 끊겼던 친구와 다시 연락하며 또 친해졌고. 취업만 못했을 뿐이지 일은 꽤 잘 진행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의 ‘그렇지? 너도 불행하지? 우리 같이 가야 하는 거야’라는 이상한 동지애가 담긴 눈빛과 말투에 ‘어으어어엉그렇구만’하고 얼떨떨하게 동의했다.

KakaoTalk_20210822_173030373_01.jpg 구름이라고 그렸는데 화투에 나올법한 그림이 완성되었군요.

일이 잘 안 풀릴 때, 그리고 그게 지속될 때 아무도 옆에 없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이 나와 함께 그 앞 안 보이는 터널을 으쌰 으쌰 하면서 걸어가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신의 안 풀리는 상황에 나를 위안으로 삼고 있는지는 잘 구분해야 한다. 믿었다가 진실을 깨닫는 순간에 꽤 아프기 때문이다.


‘우리’라고 묶어서 불행해했던 그 친구는 내가 비싼 새로운 기기를 사거나,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안절부절 못해하며 심술을 부렸다. 내가 잘 지내는 걸 납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새로운 기기와 친구들이 잘 지내는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내가 약속이 있는 날이면 나를 따돌리고 우리가 소속된 무리와 약속을 만들었다. 뭐, 그렇게 해서 그가 행복하다면야 다행이지만 그런 얄랑한 행복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그마저 'X'같아지는건 아닌지?

KakaoTalk_20210822_173030373_05 (1).jpg 참고로 저는 수능때 지구과학을 치지 않았습니다 천체에서 포기했거든요.
너 요즘 힘든 일 있잖아, 그렇지?

인턴도 안되고, 취업도 계속 안되고 어떻게 해.

마치 내 힘든 일을 바라는 듯한 말투에 별 일이 없다고 대꾸하면 실망한다. 그런 기색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의도가 없다면 적어도 들키지 않을 정도의 머리는 굴려야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이번 추석 때 얼마나 친척들이 네 걱정하는 줄 알아! 얼른 정규직 취직해야 할 거 아냐!

이번 추석 이후에 아버지께 이런 잔소리를 들었다.진짜 걱정되면 뭐라도 해주던가. 아직 내 앞에 굴러들어 온 콩고물도 없는 거 보면 그냥 걱정하는 척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분들은 내가 이렇게 코를 훌쩍거리며 어찌어찌 잘 지낸다는 사실을 알면 실망할 것이다. 어쨌건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아버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어떻게 살든 어차피 걱정하는 사람이기에 나는 역으로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상호간의 걱정은 한 사람만 하면 충분하고 나는 아버지와의 '걱정 팀프로젝트'에 무임승차를 했다.

KakaoTalk_20210822_173030373_05.jpg 밖의 하늘과 상관없이 여러분은 어떤 하늘을 늘 품고 있나요

맛있는 음식 먹으면 행복하고 가끔 서류가 붙으면 행복하고 하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불안하지만 불행하진 않다. 잘 지낼 수 없는 상황의 사람, 하지만 당신들의 걱정과 다르게 난 멀쩡하다. 물론 좋은 상황은 아니다. 당연히 불안하다, 게다가 올해도 끝나가는데 내가 사회로 들어갈 수는 있을지 걱정이 된다. 그렇다고 그 친구의 먹잇감이 되기 싫어서 무리해서 행복한 척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냥 잘 지내기로 했다.

'감히' 책을 읽고 감동하고

'감히' 비싼 커피를 사 먹고

'감히' 친구나 어머니한테 투정을 부리고

'감히' 그 친구를 거기 두고 잘 지내기로 했다. 그 친구가 언제까지 'X같'을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한탄으로 내 발목을 잡으면 나는 또 잡히겠지. 하지만 그건 그 순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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