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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드쉠 Dec 04. 2023

전생 혹은 유전자에 따라

생을 지속하게 하는 사소한 보람

COVER. Hunter's supper 1909 - Frederic Remington.


세탁기가 고장이 났다. 나는 장박지에서 가져온 빨래 더미를 앞에 두고 잠시 난감했지만, 잠시 뿐. 별 고민 없이 손 빨래를 시작했다. 얇은 반팔 티셔츠 두 개와 여러벌의 속옷과 양말, 두꺼운 후리스 티셔츠와 기모 바지까지 꼭 비틀어 짜서 건조대에 널고 나서 생각했다. ‘나 손빨래 좋아했었지?’

한 달 이상의 장기 출장을 갈 때에도, 세탁기와 주방이 구비된 레지던스가 아니라면, 한달치 속옷과 양말을 모두 챙겨갈 수는 없다. 나는 일주일 분량의 짐을 챙기고, 어떤 특급 호텔에서나 자연스럽게 그냘의 빨랫감을 샤워후 세탁하고, 옷걸이에 걸어 말리곤 했다. 2박 3일이라도 한 벌의 여벌 속옷과 양말을 가져가 첫날 입은 것은 그날 빨아 말린다.

고급 호텔이건, 시골의 펜션이건 숙박 시설의 방은 대체로 건조한 편이라. 빨래를 말리며 가습 효과를 기대한다는 뭔가 실용적인 만족감도 있었던 것 같다. 아, 속옷을 널어두고 룸서비스를 시켜 서로 난감한 적도 있었지.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어쩐지 그날 그날의 손빨래를 하는 것과, 캠핑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내 모습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정확히 짚어 말할 순 없지만 어쩐지 그 모든 것들은 같은 계열의 취향인 것 같다고, 그래. 그렇지. 그럴 수 밖에.


농담처럼 나는 전생에 유목민이거나, 수렵인, 중세 유럽이라면 떠돌아다니는 용병, 서부 개척 시대라면 현상금 사냥꾼같은 정착지 없이 떠돌아다니던 사람일 거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건 준비 없이 떠났던 벌교의 무료 캠핑장에서였다. 우리는 화로대와 돗자리, 의자 정도가 있었고 타프도 조명도 없는 상태였다. 갯벌 옆에 어촌 마을에서 운영하고 있는 캠핑장은, 중간에 마을 이장님이 돈을 받으러 오신다고 했지만,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고, 가로등 조차 켜져있지 않았다. 어둠 속에 우리 뿐이었다. 아무려나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기 전 저녁 식사를 거기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10월 말의 바닷바람은 제법 차가웠고, 불을 피웠지만 등부터 추웠다. 각자 불 앞에 모여 담요를 둘러쓰고 밥을 먹으면서 내가 물었는데, ‘다들 추워서 죽을 것 같은데, 아주 죽지 않을 만큼 따듯할 때 느끼는 그런 만족감이 있지 않아?’ 내 이야기를 들은 두 친구는 그런 건 전혀 없다고 했고, 마조키스트적인 변태 취향 같다고 나를 놀렸는데 나에겐 그게 나름 충격이었다. 나는 잠이 들기 전까지 일부러 집의 보일러를 켜지 않고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추위를 견디다가 전기장판이 켜진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자곤 했으니까. 그 기쁨은 너무 충만한 것이어서, 아니 이건 석유 곤로 냄새 같은 걸 좋아하는 뭔가 설명할 순 없지만 보편적인 취향인 줄 알았지.


내가 캠핑을 좋아하는 이유를 추위에 연결해서 생각하게 된 것도 그 때 이후였다.종종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걸 떠올리곤 했다. 먼 길을 떠난 사람이 악천후를 만나고, 고생을 하고 지칠대로 지친 어느 날, 밤이 깊기 전 도착한 숲의 나무 아래에서 불을 피우고 자는 그런 장면. 손발이 얼도록 춥지만 불 옆에서 발과 젖은 옷을 말리고, 근처에 개울이 있다면 간단한 빨래도 할 수 있고 그 불에 따듯한 음식을 익혀 먹겠지.. 망토를 담요처럼 덮고, 중간중간 일어나 불을 지켜가며 아주 가느다란 온기에 의지해 보내는 밤.

영화에서 그런 밤은 대개 안심과 동시에 불안을 준다. 어디에서 다시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이 순간이 너무 평온하고 거짓말같아서 그 작은 온기에도 모든 긴장과 피로를 내려놓고 잠들어 버릴 것만 같은 평화.‘제발 주인공이 이 밤만큼은 무사히 보낼 수 있게 해주세요.’ 그 간절함과 불안이 그 밤을 더 아름답게 기억하게 한다는 걸 시나리오 작가들도 다 알겠지.

친구들의 놀림이 아니었더라도 따스하게 잠드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일부러 더 춥게 지냈던 나의 생활에는 이상한 욕망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것은 더 극한의 쾌락을 느끼기 위해 고통을 선행하는 어떤 취향들과 같은 맥략에 서있을 것이다. 조금 수치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모든 쾌락은 고통이 함께 수반될 때 극대화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 것만으로 설명되기엔 그 욕망 안에는 더 건강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것은 인류가 필연적으로 지켜내야할 생존. 그 것에 마주하던 기억. 그 것을 반복하는 의식같은 것으로서의 기능 말이다.

우울증이나 기타 심리적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도전과 성취는 보편적으로 권장되는 행동 치료다. 아니 굳이 치료까지 가지 않아도 세상의 많은 취미 생활들이 다 그렇게 출발하는 것이니까.

이를테면 목공이나 수공예처럼 무언갈 만드는 것은 인생의 긴 호흡에 비하면 짧은 시간 안에 하나를 완성할 수 있고 그 안에서 보람을 느끼게 한다. 시작부터 완성까지의 과정에는 물론 여러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 것은 각자 걸리는 시간이 다를 뿐 결국 극복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과정에서 부딪히는 작은 어려움들은 오히려 오락이다. 그리고 끝내 하나의 무언가를 완성했을 때 찾아오는 뿌듯한 성취감.

그 것은 내가 숲 속에서 불안의 밤을 무사히 보내고 맞은 개인 아침처럼, 삶을 축소해 체험하게 하는 작은 치유 과정이다. 왜 아니겠는가. 심지어 모바일 게임조차도 그 심리적 과정을 거쳐 사람을 몰입하게 하는 걸.

이러한 작은 체험-치유의 과정이 누군가에게는 만들기로, 누군가에게는 식물을 키우는 것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스포츠에서의 기록 도전으로 나타나는 것을 나는 종종 전생의 기억에 비유하곤 했다. 어쩌면 유전자에 새겨진 조상의 기억일 수도 있겠지.


생의 근본은 살아남는 것, 생존 그 자체에 있다. 생존의 위협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조건이다. 생존의 위협이 극단적이라면 인간은 그 공포에 질식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의연히 맞서 견디기도 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의 투지와 존엄을 보여주는 많은 일화들. 흥미로운 것은 생존의 위협이 전혀 없거나 너무 낮아서 거의 느낄 수 없는 상태이다. 현대인 대부분은 인간 관계에서의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면, 자연으로부터 이런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는다. 이 것이 인간을 더 혼란스럽게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그 생존의 위협에 맞서 싸우던 기억을 찾아 작은 도전들을 한다. 직업은 생계라는 면에서 좀 더 생존의 위협이란 문제의 근본에 가 있긴 하지만, 이 것은 상대적으로 긴 호흡의 문제다. 오늘 번개가 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황보다는 긴 기근이나 폭정을 견디거나 견디다 못해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일들과 같다. 거기에는 보람과 위로가 차지할 공간이 적다.

캠핑 중에 부시 크래프트라는 장르가 있다. 단지 보다 와일드한 스타일로 보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작은 도구를 발견해 쓸모있게 이용하면 기뻐하고, 그 것을 통해 하루 하루 생존해나가던 인류의 기억이 있다.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버려진 캔을 주워 냄비로 쓰는 생활. 최소한의 침구로 잘 자리를 꾸미고, 불편을 견디는 생활. 내가 부시 스타일의 캠핑을 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노숙의 근본적 욕망은 거기에 가 닿아있는 것 같다.

고된 여정의 어느 하루 밤을 안전하게 보내던 기억. 말이 있었다면 함께 물을 마셨을 거고. 같이 불가 자리를 나눴을 거다.

오늘은 고양이가 있다. 안타깝게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고양이들의 건강에 좋지 않은 것 뿐이지만, 어묵 하나를 데쳐 짠기를 빼고 식혔다. 고양이와 먹을 것을 나눈다. 잠시 타프 아래에서 빈 장작 박스를 놓고 담요를 깔아 비를 피할 자리를 내어준다. ‘괜찮다면 밤에 여기서 자도 좋아’.

지금 나와 고양이는 숲 속에서 같은 밤을 맞는다. ‘나는 오늘 밤 참 근사한 잠자리를 마련했어. 그치?’ 나의 작은 안심을 고양이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그리고 새삼 생각한다. 하루 하루 생존하는 것이 삶의 근본이라는 것을. 그걸 잊고 너무 헤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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