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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드쉠 Dec 11. 2023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흔한 말 대신

솔캠, 완전하고 텅빈 나의 우주

COVER. Woman in the Wilderness. - Alphonse Mucha



집에 도착하니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산책을 했다. 잠시 멈춰 올려다본 하늘엔 맑은 겨울 날씨이기 때문인지 도심인데도 드문드문 별이 보이고 있었다. 전날 밤 캠핑장에서 본 하늘과 같은 색이었다. 차가운 쪽빛 하늘에 점처럼 박힌 별들이 전혀 다른 것 같은 두 세계를 연결해 주는 것만 같았다. 같은 하늘이라니.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역시 저 하늘 어디쯤을 날고 있을 것이다, 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가 탄 비행기는 내가 집에 도착했을 무렵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출발했을 거였다. 그는 지금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다. 집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이 어쩐지 나에게 돌아온다는 생각과 겹쳐졌다. 문득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겨울 하늘의 별을 보고 떠올리는 사람이 그라면 정말 그런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바람처럼 목 뒤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진짜 바람이었을 수도 있다.


그 바람은 사실 전 날 오전 그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밤을 새우고 겨우 새벽에 잠들어 점심이 다돼서야 일어난 참이었다. 햇볕이 텐트 안을 따스한 노란빛으로 비추고 있었지만 웬만한 추위엔 난로를 켜지 않고 자는 나의 습관 때문에 코끝에 닿는 공기는 시리게 찼다. 나는 침낭 속에서 고치처럼 몸을 웅크린 채 좀처럼 밖으로 나설 마음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밤 그에게 카톡이 와있는 걸 확인했다. 그는 여행 중이었고, 일주일에 한두 번 여행지의 소식을 메시지로 전하곤 했다. 나는 늘 그렇듯 남은 일정을 잘 보내고 오라는 말로 답한다. 그런 대화는 우리에게 암묵적인 약속 같은 거였다. 그가 자주하는 말대로 짜고치는 고스톱. 척하면 척, 쿵하면 짝. 그는 소식을 전하고, 나는 답한다. 둘 다 카톡을 자주 확인하지 않는 이유 때문에 그런 대화는 바로 이어지는 일이 드물었고, 짧게는 한두 시간 길게는 하루가 지나 답하는 일이 흔했지만 그것조차 익숙한 패턴이었다. 나는 어떤 의식도 없이 패턴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그런데 카톡을 보내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에겐 새벽이었다. 어쩌다 일찍 잠이 깼다고 했다. 우리는 한 시간 정도 통화했다. 패턴은 여전했다. 그는 말하고 나는 듣는다. 그가 여행을 갈 때마다 들려주는 먼 나라의 이야기들은 재미있을 때도 있었고, 가끔은 지루하기도 했다. 그에게 전화가 걸려올 즈음이면 나는 늘 피곤에 찌들어있는 시간이었고, 대화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었다. 그래도 즐거움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갖는 신뢰와 편안함의 감정, 누군가 나를 그런 마음으로 대한다는 게 드물고 소중한 일이라는 건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된다.

통화를 하며 겨우 침낭에서 나와 커피를 내렸다. 나는 어쩐지 조금 들뜬 마음이었다. 늦은 퇴근 후의 통화가 아닌 다른 시간대의 통화였기 때문일까. 나는 그가 말하는 이야기 하나하나에 귀 기울였고 우리가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이 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몹시 특별하게 여겨졌다. 나는 그 전화가 반가웠던 것이다.

문득 그런 내가 낯설었다.


그와 나는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같은 패턴을 유지해 왔다. 길게는 몇 년씩 연락이 끊긴 적도 있었고, 서로 연락을 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었다. 어느 날 연락이 끊어지면 그저 잘 살고 있겠거니 하는, 그러다 다시 만나도 어제 만난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의 대화. 그와 같이 보내는 시간은 항상 밀도가 있었고 우리는 꽤 친밀한 관계로 많은 것을 공유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없으면 또 그대로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그의 부재가 나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그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딱히 하지도 않았고, 그와 같이 하던 어떤 일들을 혼자 하는 데도 아쉬움이 없었다. 어쩌면 그는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엮이지 않는. 얼마 전 본 아라문의 검이라는 드라마에서는 모모족이 그걸 ‘갈마’라고 하던데. 보편적인 말로는 ‘업’이라고 하는 게 가장 가까울까. 업이라는 단어는 왠지 너무 무거운 것 같다. 업보, 죄의 느낌을 주니까. 그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관계에서 엮이는 것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걸 말하기에 ‘갈마’라는 단어가 적당할 것 같다. 그와 나 사이엔 한 번도 ‘갈마’ 같은 게 맺어진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가 요즘 들어 부쩍 나에게 연락을 자주 하는 것도, 굳이 시간대를 맞춰 전화를 걸어오는 것도 조금은 패턴에서 틀어진 일이었다. 그는 너무 많은 걸 공유했고 나는 너무 많은 걸 알았다. 이런 건 ‘갈마’가 맺어지기 쉬운 상황으로 흘러가는 거 아닌가? 아니, 그 순간 나의 상황 자체가 갈마였을 수도 있다. 갈마가 맺어지지 않으려면, 내가 없어야 한다. 드라마에서도 말하던데, 갈마 없는 인생은 없다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갈마라고. 그간 나는 사회생활이라는 시뮬레이션 게임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느라 나라는 존재를 텅 비워놓고 있었던 게 아닌가. 내가 비었으니 갈마가 생길 턱이 있나?

그렇다면 비웠던 내가 채워진 것일까? 뭐가 달랐나. 생각은 이어졌다. 나는 캠핑 중이었다. 혼자서 이틀 밤을 보내고 삼일 째 낮을 맞는 참이었다. 지난밤 바람 소리와 알 수 없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에 새벽까지 뒤척이는 밤을 보내고 나서였다. 산속의 밤은 어두웠으며 나는 혼자였다. 외로웠다.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친구들과 함께 가는 캠핑, 가족 캠핑, 커플 캠핑 등과 솔캠, 혼자 가는 캠핑은 완전히 다른 장르다. 이 것은 장비와 장소, 행위의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다른 활동이다. 둘 이상이 함께하는 캠핑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혼자 하는 캠핑은 ‘혼자’라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하는 캠핑에서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들은 당연히 함께 하는 것들이다. 함께 맛있는 것을 나누고, 긴 대화를 하고 집보다는 다소 열악한 상황을 함께 견디며 추억을 쌓는 것. 그야말로 MT, 멤버십 트레이닝이 된다. 솔캠에는 그 모든 것들이 없다. 텐트를 피칭하고 장비를 세팅하는 일이 끝나면 솔로 캠퍼의 앞에는 그저 텅 빈 시간이 기다린다.

그 텅 빈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는가 하는 것이 각자의 삶의 방식, 캠핑 스타일이 된다. 어쩐지 그 상황에서는 평소 모바일 게임이나 넷플릭스 영상을 즐기던 사람도 그런 것만으로는 시간을 보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마도 완전히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모든 도파민이 충족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나의 경우는 요리도, 때로는 불멍도 하지 않는다. 텐트와 장비를 정리하는 노동에 많은 시간을 쓰고, 생활을 위해 뭔가 더 한다면 커피 내리기 정도다. 이제는 음악조차 거슬릴 때가 많다. 나는 그저 그 빈 시간을 그대로 견딘다. 앉아서 산을 바라본다. 다가오는 고양이와 눈인사를 한다. 그러다 할 일이 생각나면 한다. 그리고 다시 공백. 그 비어있음은 자연스럽다.

끝나지 않는 공백이다. 나는 도무지 그것을 끝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텅 빈 시간 다음에 다시 텅 빈 시간. 언제까지라도 그걸 지속할 수 있을 것 만 같다. 그리고 어둠이 짙어져 앞의 숲이 보이지 않을 때쯤이면 아주 달콤한 외로움이 찾아온다. 온전히 혼자라는 감각이 피부부터 혈관 하나하나를 타고 전신에 퍼진다. 추위 속의 가녀린 온기에 대한 집착처럼, 나는 이 달콤함을 놓지 못해서 매번 다시 집을 나오는 것만 같다.


다시 그의 전화를 받던 순간으로 돌아가자.

나는 외로웠다. 그 외로움이 주는 시림에 모든 감각은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롭게 서있었고, 침낭 속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으면서도 세상의 모든 소리와 냄새, 작은 먼지 한 톨이 피부에 내려앉는 것까지도 느낄 수 있을 듯했다. 그러니 그 순간 나는 온몸으로 깨어있었다. 무엇을 해도 갈마가 생길 수밖에 없는, 살아있음의 상태였던 거다.

그의 낮고 느린 다정한 목소리, 조심스러운 말투, 사이사이 터져 나오는 천진한 웃음. 우리가 늘 주고받는 말장난. 그 하나하나가 아주 좋은 샴페인이 혀를 타고 넘어갈 때처럼 나의 외로움을 건드렸다. 최고급 샴페인의 탄산은 그 터치가 정상급 피아노 연주자의 것과 같다. 부드러운데 둔하지 않고, 아주 가녀리지만 힘이 있다. ‘아,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뭐가 사랑이겠어!‘싶게 넘실거리는 감각. 그래 섹스 앤 더시티에서 캐리 브래드쇼가 그랬지. 수천 마리의 나비가 뱃속을 날아다니는 기분이라고.


이 관계에 어떤 이름을 붙이고 싶은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친구라는 이름으로 편안했고, 한 번쯤은 좀 더 나아가 어떤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같은 자리로 되돌아갔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그냥 너와 나의 사이. 솔직히 친구라는 단어가 가장 스펙트럼이 넓어서 친구라고 할 뿐이지. 우리는 보편적인 친구 관계도 아닌 것 같은데.

그가 나에게 어떤 절실함이나 아쉬움이 있었다면 나도 알았을 것이다. 반대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내가 그에게 어떤 의미로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 역시 나에게 유일하다. 그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그를 어떤 다른 존재로 대체할 수는 없다. 어떤 관계의 자리에 그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 만의 자리를 갖는다.

이름이 없는 관계. 

함께 하는 캠핑과 혼자 하는 캠핑이 전혀 다른 일인 것처럼 이름이 있는 관계와 없는 관계 역시 그러하다. 관계에 이름이 붙으면 그에 맞는 의무를 갖게 된다. 우리는 이름표를 압정으로 꽂듯이 어떤 이름에 관계를 고정시킨다. 그리고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름이 있는 관계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웨딩링처럼 영원하고 단단한 결합일 수도 있고, 키스마크 같은 열정의 표식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그런 것은 없다. 보이는 게 있다면 겹치듯 엇갈리듯 긴 세월을 걸어온 발자국뿐이겠지.


산책을 마칠 때쯤, 내가 긴 시간 동안 그를 만나온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를 생각하는 마음의 시작. 어렵지 않게 장면들이 떠올랐다. 설렘이나 열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 떠오른 것은 그가 나를 만날 때 짓는 반가움의 표정이었다. 매일 만날 때나 몇 년 만에 만날 때나 그는 멀리서부터 눈이 마주치면 한결같이 진심으로 온 얼굴에 행복이 퍼지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건 늘 나에게 특별하고 소중한 순간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그 의미를 이해한 것만 같다.

그 역시 외로웠던 거다.


보편적인 시각으로 그는 지나치게 고립된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혼자 해야 할 것이 많았다. 자기 세계 안에서 온전했다. 온전한 데 외로울 게 있냐고? 이제 알았다니까. 정말 온전해서 외로운 거다.

소믈리에들이 와인 테이스팅을 하기 위해 물로 입을 헹구는 것 같은 과정. 그러나 하루를 단식한다면? 더 예민하게 느끼게 될 거다. 일주일 단식을 해 본 적이 있었는데 마지막 날 참지 못하고 엄지손톱만큼의 식빵을 뜯어먹었다. 그때 느낀 단 맛은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그 어떤 디저트의 달콤함보다도 압도적인 것이었다.

나는 캠핑을 하고 나서야 그 텅 빈 고요와 외로움을 오롯이 느끼게 되었다. 이 우주 안에서, 나로 살고 있는 것은 나 뿐이라는,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절대적 고독. 무한한 우주의 어둠 속에 혼자 서있는 고요. 그가 혼자 여행을 하며 보내는 그 시간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 내가 사는 성의 백성 없는 독재자일 수밖에 없다는 걸.


내가 느낀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 것은 오히려 광활한 우주의 은하에서 쏟아지는 점점의 별같은 외로움의 폭포였다.

텅 빈 고독의 끝에 잠시 마주치는 달콤하면서도 쓰린 위로처럼 그 순간에 점을 찍었다. 그리고 다시 고독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게 본질이니까.


그는 도시 여행을 좋아한다. 캠핑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웃도어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걸 모르던 때 한 번 놀러 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언제 한 번은 가겠다고 그런 말을 했었는데, 아니다. 그 초대는 무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만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 공허함을 마주하려고 캠핑을 한다. 아무도 없는 숲 속의 텐트 안에 덩그러니 놓인 나를 보려고. 부화하기 전의 병아리처럼 완전한 우주 속에 있는 나를.

그리고 그런 밤 도시의 밤거리를 홀로 걷는 누군가도 있겠지


이름을 붙이려는 시도 따윈 하지않는다. 이 외로움을 끝내지 않는다.

어느날 우리는 그저 다시 반가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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