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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드쉠 Dec 18. 2023

당신은 어떤 부족입니까?

캠핑의 옷입기 - 실용성 혹은 스타일

COVER. ura-Natasha Ogunji, Will I still carry water when I am a dead woman, 2013 Photo Credit Ema Edosio





옷장을 열어보니, 몇 년 전에는 없던 종류의 옷들이 늘었다. 생각해보면 언젠가부터 인터넷 서핑을 하다보면 '캠핑에서 입어야지'하는 옷들이 눈에 띄었었다. 

날씨가 추워질 것 같으니까 구스 패딩 바지, 기모 바지, 솜 패딩 바지. 길고 두꺼운 패딩은 거추장스러우니까 질 좋은 경량 패딩, 불빵이 나면 안되니까 난연 소재의 자켓, 캠핑에선 좀 선명한 색감이 분위기 나니까 일상에션 잘 못입던 옐로우나 오렌지 계열의 상의 등 말이다. 

지금의 장박지엔 그런 옷들이 쌓여 작은 행거와 폴딩 박스 하나를 꽉 채울만큼의 양이 되었다. 


캠핑에서 옷입기란 당연히 그 기능이 우선이다. 기본적인 추위를 막아줄 수 있어야 하며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에 불편이 없어야하고, 자주 쪼그려 앉아 무언가 작업을 해야하는 상황을 고려해 신축성이 좋아야 한다. 불빵이 너무 쉽게 나는 소재는 피해야한다. 밤낮으로 일교차가 심한 캠핑장의 온도를 고려해 얇은 옷을 여러벌 껴입었다가 벗을 수 있는 레이어링이 좋다. 

그리고 물론 이런 기능성들만으론 충분하지 않은, '스타일'이 있다. 


캠핑 인스타를 돌아보면 캠퍼들의 스타일은 언뜻 비슷해보인다. 기본적으로 등산 아웃도어와 유사한 베이스에 등산보다는 좀 더 톤다운된, 그렇다고 해서 모노는 아닌 정도의 컬러를 더한다. 인디언 브릭이나 딥그린, 시멘트톤이 섞인 블루, 오렌지 브릭, 머스터드 옐로우, 브라운과 탄컬러, 올리브 카키와 같은 색감이다. 

패턴으로는 단연코 체크가 압도적, 그리고 나바호 패턴 같은 게 있을 거다. 


이런 컬러와 패턴, 캠퍼들이 즐겨입는 몇가지 아이템- 셔켓이라던가, 주머니가 많이 달린 피셔맨 스타일의 베스트, 카고 팬츠, 트레이닝과 아웃도어를 적절히 믹스한 아이템 들은 기능성 외에 스타일의 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기준으로 옷을 고르는가에 생각이 미쳤다


그것은 일상에서의 스타일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준을 가질 것이지만, 기능성이란 면에 대한 고려가 좀 더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능성은 여러 케이스-여러 사람, 여러 상황-을 거듭하면서 결국 다시 스타일이 된다. 80년에 스케이트 보더 들의 스타일, 힙합 뮤지션들의 스타일 같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기능성은 기능의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면서 어느 순간 그 이유로 어떤 Scene의 감성을 담는다. 


나는 되도록 나의 스타일이, 나의 캠핑이 지향하는 바와 같은 맥락으로 이어지기를 바랬다. '혼자', '바깥에서 자는 것'말이다. 거기에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의 고려는 없는 게 마땅하다. 내가 입은 것이 어떻게 보일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어떤 분위기일지, 너무 튀지 않을지 너무 초라해보이지 않을지 하는 것들 말이다.

 

과거로 돌아가 혼자 바깥에서 자는 사람들이 입었던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중세의 떠돌이 기사나, 서부 개척시대의 카우보이들. 의복이 귀했던 시대에 그 것은 당연히 시대적 상황, 자원의 부족이라는 한계에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평소 입던 것보다 간소하고, 활동이 편안한 옷을 선택할 것이다. 추위와 짐승의 공격을 고려해 보온성이 강조된다. 꽤 값이 나갔을 가죽, 짐승의 모피, 튼튼한 누빔 천 같은 것들이 더해진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구해진 귀한 소재의 옷들은, 피부처럼 한 몸이다. 갈아입는 일은 드물다. 어느 안전하고 여유있는 밤 잠깐 세탁하고 손질하여 다음날 길을 떠나기 전 다시 입는 옷.


나의 스타일이 그 근본에 부합하는 스타일이었나에는 의문이 있다. 

애초에 나는 캠핑용 복장이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모두 새로 구비한 것이 아니었고, 당연하게도 평소 내가 입던 옷들에 캠핑 아이템을 더한 스타일이 되었으니까. 

집에서 편하게 입던 트레이닝복, 티셔츠 위에 캠핑에 어울릴 법한 플란넬 체크 셔츠를 걸치고, 경량 패딩이나 후리스를 입어준다. 이 정도라면 텐트 앞의 화롯대에 혼자 앉아 밤을 보내기에 충분히 따듯하기도 하고 바깥에서 혼자 자는 데에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늘 거기서 더 나아간다. 목적을 벗어난 무언가가 꿈틀꿈틀 머리를 들이밀고 삐져나온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지만 나는 이 Scene의 분위기를 생각한다. 낙엽이 지는 어느 가을날의 숲 속, 눈이 발목까지 쌓인 겨울 산, 여름날 장마 후 계곡 옆의 청량함, 벚꽂나무 아래 찰나의 봄같은 순간들. 

그 것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그저 나의 만족인가 사이에서 아무리 솔직하게 답하려 한들 딱 꼬집어 말은 못하겠다. 


나는 내가 만든 캠핑씬, 인생의 한 장면을 그럴싸하게 영화의 세트장처럼 구현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지만 곧바로 아무도 보지 않는 영화의 세트장이 어떤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지난주였나. 장박지에 매주 오고 가는 팀들의 스타일도 모두 다르다. 그날은 좀 색달랐다. 내가 머무는 장박지는 도심에서 가까운 곳이고 그래서 가족 단위나 하루저녁 야외에서 술자리를 가지고 싶은 팀들이 많은 편이다. 그 날의 팀 역시 술자리가 메인인 것 같았는데 일단 텐트부터가 달랐다. 그들은 각자의 백패킹 텐트를 들고와 1인 1텐트를 세팅했다. 텐트 역시 전문 백패커들이 쓰는 꽤 고가의 브랜드였다. 백패커들에게 흔한 등산 복장이었고, 꽤 추운 영하의 날씨에 바람막이도 없이 바깥에서 불을 피웠다. 세 사람이 그 불을 온기삼아 둘러앉아 소주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곁들이고 있었다. 그 장면은 내 텐트에서 바로 맞은 편에 보였다. 

조금 낯선 풍경이었다. 장박의 많은 짐을 고려한나의 에어 쉘터 맞은 편에 어느 산 정상에서나 볼법한 백패커들이 앉아있는 모습. 


나는 의식하지 못한채로 그날 저녁의 의상을 선택했는데, 그건 등산용 경량 패딩에 겨울용 등산 바지가 아닌, 루즈한 기모 트레이닝 팬츠에 노르딕 패턴의 니트, 그리고 포근한 올리브 카키의 플리스 점퍼였다. 니트로 된 바라클라바를 위에 걸쳤다. 등유 난로를 켜고 우레탄 창 바깥으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다시보았다. 나는 문득 내가 여기 거주하고 있는 주민으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일 아침 다시 짐을 쌀 필요가 없는 여유, 이 곳에서 오랜 시간 머무른 자의 익숙함, 활동성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이 생활은 나에게 예외적인 액티비티가 아니라는, 반복되는 일상으로서의 편안함이 있다는 인식.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입은 것들을 선택하게 했다. 


그러고 나니 우리는 전혀 다른 곳에서 출발해 지금 여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백패커들이 왜 주말 저녁 도심에서 가까운 캠핑장에 텐트를 치게 된 것일까. 자동차 없는 미니멀 캠퍼로 최소한의 짐을 들고 하룻밤 바깥에서 자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나는 어쩌다 이 곳에 원룸 이삿짐 만큼의 장비를 세팅하고 머물고 있는가. 

또한 이 곳은 여전히 그저 하룻밤 혹은 몇날 밤을, 그게 몇 개월이라 할지라도 스쳐가는 장소임을 새삼 알아챈다. 우리는 모두 짐을 떠나 어느밤 야영지의 어둠 속에 흐릿한 얼굴을 보게 된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표식이 있다면 좀 더 마음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도 소속되어있으리라고 믿는 부족의 옷을 입고 있다. 그 옛날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대이동이 있던 시대에도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 그 혹독한 대이동의 대열을 이탈하여 도망쳤다면, 그런 이들이 어느 밤 강가의 조용한 비박지에서 마주쳤다면, 이름을 몰라도 입고 있는 옷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동물을 사냥하며 어디에서 살아왔는지 그 것이 사막인지, 울창한 숲 속인지, 어떤 무기를 쓰는지. 


나는 그들이 밤늦께까지 목소리를 높이는 다른 팀들처럼 고성방가를 하지는 않으리라 확신했다. 백패커들은 다음날의 산행을 위해 일찍 잠드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나는 주민처럼 별 일 없다는 듯 저녁의 일상을 보냈다. 가벼운 저녁을 먹고 따뜻한 차를 마시고, 샤워바구니를 들고 샤워장에 가 뜨거운 물로 몸을 씻었다. 

모든 것이 안심이 되었다. 

이렇게 각자 다른 부족이 마주치는 하나의 Scene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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