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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L Jun 09. 2023

모래의 여자

책 읽는 시간 (가을에서 겨울 지나)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지음, 김 난주 옮김, (주)민음사, 2001년


    아베 코보는 전후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로 인간의 정체성과 소외에 대해 깊이 있게 파고든다. 본 작품은 곤충 채집을 위해 외딴 마을을 찾았던 한 남자가 모래 속에 억류되고 강제 노역을 하는 동안 나타나는 육체적, 심리적 변화를 내밀하게 묘사한다.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인생, 결혼은 정액권, 미래가 없는 삶은 편도권, 미래의 희망을 품을 때 왕복권'


    탈출을 위한 집요한 노력 끝에 왕복권을 확보하였지만,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없는 공백으로 유예되어 버린 삶 앞에서 탈출을 미루는 주인공. 실종 신고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나자 법원은 남자의 사망을 선고한다. 죽지 않았는데 죽은 것으로 처리된 남자. 어쩌면 처음부터 남자는 존재하지만 잡을 수 없는 세계를 찾아 나섰는지도 모른다. 존재하지만 이름 없는 곤충을 찾아 자기 이름을 알리겠다는 욕망처럼. 아니면 모든 이야기가 만화책을 읽고 정신 분열을 일으킨 남자의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멍청한 추론까지….     

  

    그냥 순박한 해변 마을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감금되어 강제 노역에 처해졌음을 안 순간부터 시작된 분노는 파업과 인질, 폭력으로 발전하지만, 결국은 배급을 위한 타협과 포기에 이르고 만다. 그 순간지도 계속 떠나 온 세상의 일을 생각하고 돌아가기 위한 탈출을 계획하는 남자. 그렇지만 함께 하는 여자의 존재가 점점 크게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애향 정신’으로 무장하고 '모래의 힘'에 순응한 상태인 여자는 남자를 감금하기 위한 미끼였다. 인질과 폭력 사건의 와중에서 탈출을 위한 도구가 되었음에도, 남자가 탈출에 실패하고 돌아왔을 때는 여자의 변호에 위로받는다.


    남자는 처음부터 이런 전개를 예측했다. 여자의 태도를 경계하면서 그녀와 성관계를 맺는다면 그들로부터 조종받게 될 것이라 예상했다. 모래에 대한 공포와 절망을 때론 폭력적으로 여자에게 분출한다. 남자가 어느 정도 탈출을 포기하고 라디오와 소나무를 이야기하는 단계에서 두 사람은 이미 부부의 역할을 한다. 유수 장치를 발견하고 탈출의 기회가 생겼지만 남자는 탈출을 주저한다. 이미 잊힌 바깥 세계에는 자신의 무용담을 들어줄 사람들이 없다는 절망과 여자를 기다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함께하기에 오늘이나 내일이나 언제든 탈출할 수 있다고 자신을 설득한다.

   

   모래가 주는 엄청난 위압에 마을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키려 한다. 그것이 외지인을 납치하여 강제 노역을 시키는 것이라지만 정착한 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 체제 안에서 살아온 여자는 동물적으로 생존에 집착한다. 반면, 남자는 메시아나 구조대 따위를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탈출하려 한다.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는지 모르게 동화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인 두 운명은 서로를 위한 시간을 준비한다. 이제는 모두가 익숙해져 도망쳐도 돌아갈 곳이 없고, 다시 잡혀와도 억울하지 않다는 생각에 남자가 확보한 왕복권은 잊힌 징표이다.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자유롭고 모래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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